처맞기 전까지는 계획이 있던 에디터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를 읽고

by 이소연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다른 때가 아니라 현재여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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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 어크로스 (2018. 11. 30)


김영민 교수가 쓴 글을 좋아한다. 칼로 깍둑 썰기한 듯한 그의 유머를 특히 좋아한다.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는 칼럼은 그가 내 세대 동년배 친구들에게 유명해진 계기가 된 글이다. 나도 단톡방에 올라오는 그 글을 읽었는데, 매 해 추석·설날이 되면 자꾸만 떠오른다. 그래서 좋다. 자꾸 떠오르는 글이라서.


OO란 무엇인가 라는 표현도 좋다. 한참 열을 올린 토론이 이어지다가도, 'OO란 무엇인가'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허무해진다. 아산서원 작은 교실에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읽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aletheia!'를 외치던, 그 기분 좋은 허무함이 든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어 지는 허무함이 아니라, 너무 허무해서 더 끈질기게 생각하고 고민해보고 싶어 지는 그런 허무함.


회색 종이 작은 사설란에 담겼던 '칼럼'이었음에도(?) 얼마나 핫(?)했냐면, 그를 비판하는 글까지 나오고 또 그 글을 비판하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하지만 어쩌고 저쩌고 다 떠나, 나는 다른 사람 글보다 그의 글이 무척 재밌다.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은 그의 글이 가진 힘이 부럽다. 그래서 그의 칼럼을 모아두었다는 책을 한 권 읽어봤다. 책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장엄한 제목과 달리, 풋 하고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 손가락으로 잔뜩 긴장한 미간을 풀어야 했지만.




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나도 글을 쓸 계획은 항상 가지고 있다. 독서모임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브런치까지 열었다. 그런데 나는 에디터라는 직업한테 처맞고 있다.


작가는 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잘 쓴다. 사실 나도 생각은 잘한다. 하지만 글을 안 쓴다. 요 근래 나는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내 인생에서 썼던 모든 글보다 더 많이 글을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글을 안 쓴다'. 내 생각이 아닌 글이기 때문에, 글을 안 쓰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그의 사적인 글쓰기가 부러웠다. 교수로서 전공 분야 전문가가 독자인 논문만 쓰는 게 아니라, 때때로 일반 시민이 독자인 칼럼을 쓰는 그가 부러웠다. 나도 회사 뉴스레터 독자가 아닌, 일반 시민이 독자인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며, 블로그며, 공간을 만들어두었지만, '에디터'한테 처맞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집에 오면, 나는 오늘 하루 내게 영감을 준 것들과 제대로 인사 한번 나누지 못하고, 인스타그램 웃긴 계정에서 허우적대다가 잠이 든다. 아니면 낭만닥터 김사부를 보는 언니 옆에서 누워서 깔깔 대다가 잠이 든다.


그의 번듯한 직업과 능력, 그에 따라 물 밀듯 들어오는 칼럼 기고 요청이 부럽다. 그가 떠오르는 생각을 잘 붙잡아 글로 잘 풀어내는 이유는, 아마 칼럼이라는 과제

가 쭉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도 <우리말 글쓰기> 과제를 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지나갈 수 있는 단상과 고민도 곧잘 글로 붙잡아 쓰곤 했다. 강아지의 죽음, 고속버스 사고, 그날 저녁 메뉴까지 모두 글감이 됐다. 나는 문득 내게 주어진 과제와 마감일이 부럽고 그리웠다. 어느 작가처럼 일단 돈부터 받고 매일 글을 써 레터로 보내주겠다고 독자와 약속하지 않으면, 나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게으름뱅이인 걸까.


나도 다시 '내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사적인 글쓰기가 그리워졌다. 과제와 마감일은 없지만, 내 생각을 글로 만들어가는 그 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에디터의 글쓰기가 아니라, 이소연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 책은 그동안 교수가 낸 칼럼을 엮어서 낸 거라, 칼럼을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다.

아래는 내가 꼽은 김영민 교수의 칼럼들. 빨간색은 꼭 읽어야 합니다. 꼭이요(미래의 나에게).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수능 이후>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런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K교수의 국가론>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잖아요. ‘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라고. 제 농담은 그 말에 대한 각주 아닐까요? 그 언론인의 내면에 깃든 시란 설익은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


<2월의 졸업생들에게>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낭비해버리는 것은 그 나름 쾌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희망을 묻다>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은 자유와 존엄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태어난 당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스스로의 결정이 완전히 배제된, 전적으로 타율적인 사태이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벌거벗겨지고, 씻겨지고, 볼이 잡아당겨지고, 신생아실에 무력하게 눕혀진다. 이렇게 시작된 자신의 삶은, 건조하게 말하여, 부모의 성욕이 원인이 된 외인성(外因性) 사태이다.


<하데스와 시시포스>


시시포스가 상징하는 노고, 덧없음, 끝없음을 다루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그리고 출산율.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19세기 유한계급 양반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느라 이토록 분주한 것이 아닐까요?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설거지만 하며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각 세대는 자신의 설거지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대 간의 정의(justic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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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할 때, 창문을 열고 '월요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나는 이런 삶을 더욱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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