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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Aug 03. 2021

할머니, 나를 잊어도 돼

할머니의 오늘은 오늘 시작된다

소연이란 년은 전화도 한 번 안 하고 요새는 통 들르지도 않는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너 왔다간 것 또 그새 다 까먹으셨단다. 엄마의 전화였다. 

꾸역꾸역 없는 시간을 내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며칠 밤을 자고 올라오는 기차 안이었다. 엄마는 서운해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해 주셨는데, 나는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몇 년 전, 처음 할머니의 치매 소식을 들었을 땐 눈물이 왈칵 났다. 농사면 농사, 요리면 요리, 어느 것 하나 야무지게 안 하는 일이 없던 할머니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마을 이름을 따 '물맹이댁'이라고 불리던 할머니는 누구보다 충실히 '물맹이댁' 삶을 사셨다. 할머니는 행여나 콩 한쪽이 떨어질까 겹겹이 콩을 털어내고, 야무지게도 키를 까불렸다. 그런 할머니가 치매라니. 제 손으로 파리채를 드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셨다니. 


할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하루하루를 모두 잊었다. 다행히 전에 있던 기억을 모두 잃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 '네가 누구더라' 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힘들었다. 


난 운이 좋았다. 할머니는 똑같은 질문을 수십수백 번을 반복하는 한이 있어도, 어느 시기 이전의 기억까지는 잊지 않으셨다. 서울 사는 손녀딸, 대학생 손녀딸로만 오래도록 기억하시다가 요새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기억하신다. 그러니까 심한 날에는, 내가 마당에 있는 방울이를 데리고 산책을 오래 나가면, 내가 왔다는 사실을 잊고는 방울이가 도망가버린 줄 알고 통곡하시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할머니 댁에 머물렀던 지난 며칠이 할머니에겐 대충 이런 거 아니었을까. 

눈을 떴을 때 내가 옆에 있으면 '꿈뻑. 야가 왜 여기 누웠지. 아, 어제 우리 집에 놀러 왔나 보다. 소연아. 일어나. 아침 먹자' 하는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내가 없었더라도 '얘가 어디 갔지?' 하는 게 아니라 '꿈뻑. 아침 먹어야지.' 하는 것이다. 지난밤 '할머니, 내일은 저기 삼거리로 콩국수 먹으러 가자.' 부단히도 재잘거리던 그 대화는 모두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후였을 것이다. 그저 새로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주치는 존재와 상황이 할머니의 오늘을 새로 채워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의 일을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한 채 오늘을 시작한다. 어제와 오늘의 굴레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오늘은 다르다. 오늘이 그저 오늘 시작되는 거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이 있을 거고, 또 오늘이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치매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저 가장 두려운 것은 할머니와의 오늘이 사라지는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치매에 걸린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한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밖에.


나는 할머니와 거듭되는 오늘을 살면서, 주인공의 말이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할머니, 이제 나를 잊어도 돼. 함께 자고, 밥 해 먹고, 방울이 쓰다듬고, 마당을 빙빙 도는 제비를 보며 깔깔 웃고, 그 모든 함께 했던 시간은 분명 행복했으니까. 할머니가 나를 보며 웃었고, 내 이름을 불렀고, 연신 손을 어루만졌던 오늘은 분명 있으니까. 오늘의 할머니는 분명 행복해했으니까. 


그냥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자. 그냥 오늘 또 산책 나가자. 또 한 번 콩국수 삶아 먹자. 또 한 번 방울이를 바라보며 깔깔 웃자. 그거면 돼. 


그저 내일도 오늘이 오길, 또 내일도 오늘이 오길,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오늘이 내게 아직 많이 남아 있길. 할머니의 기억에 내가 없어도 돼. 할머니의 기억에서 내가 전혀 사라져도, 할머니가 매일 하루하루 행복한 오늘을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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