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케, 괄호 치고 전시회에 들른다

by so


얼마 전 시립도서관에 특강을 들으러 갔다. 책도 빌릴 겸 조금 일찍 갔더니 한 시간 남짓 시간이 남았다. 빈자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다 문득 출입문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TWG와 포숑, 티 포르테 ··· 익숙한 홍차 상자들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아늑한 집.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숲속에서 만난 과자집의 홍차 버전 같은 그런 집이었다. 무슨 그림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침 도서관 옆 스튜디오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헨젤이 과자집에 홀린 듯이 들어간 전시에서는 차와 찻잔, 책을 그린 그림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아무도 없는 전시회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니.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의 그림들을 오롯이 마주하는 그 시간은 오래된 아지트에 머무르는 듯했다. 입구에서 받아온 리플릿을 뒤늦게 펼쳐 본다. 찻자리를 통한 물과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다루고 있다는 작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흘러가서 아쉬운 시간을 그림 속 찻잔에 담아 마시고 싶었다.


09_머무르다.jpg 한 잔의 차는 끝없는 여정을 따라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는 자리이다. (水_머무르다, 김유진, 2025)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자니, 막연히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것일지라도 좋아하는 마음의 무게가 많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미적 센스도 없고 미술관에 가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입문자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어 전시회에 대해 써보려 한다.




나는 여러 감각이 무딘 초둔감자에 가깝다.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의 반대라고나 할까. 시끄럽고 밝은 곳에서도 머리만 대면 잘 잔다. 통각이 무뎌서 머리카락을 뽑아도 아무 느낌이 없고, 염증 같은 게 생기면 꽤 심각해져야만 아픔을 느낀다. (이건 사실 위험한 거라, 평소에 건강 검진을 꼭꼭 챙겨 받는다.) 그런 감각들이 미감(美感)에도 영향을 끼치는지 나는 그림 보는 눈도 없고 패션 센스도 꽝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 같은 문외한이 미술관에 가도 되는 걸까’라는 소심한 걱정이 들어 미술관 문턱을 넘기 힘들었다. 그런 건 서울 멋쟁이들이나 가는 거지, 몰래 훔쳐보던 전시 블로거의 포스팅을 대리만족 삼으며 촌스러운 시골쥐를 자처했다.


그러던 중 소문으로 듣던 주 4일제가 우리 회사에도 도입되었다. 물론 한 달에 한 번이지만 그게 어디냐. 이름은 패밀리데이였으나 나는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 우리 부서는 그런 거 못써.. ─ 그날을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쓰기로 했다. 이것만 끝나면 진짜 쉴 거야, 그런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다가는 때가 오지 않는다. 회사는 일이 끝나갈 만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새로운 일을 가져다주니까.


육아에도 일에도 초보이던 시절에는 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가장 만만한 나에게 소홀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두 번의 번아웃을 겪으면서 배운 것도 있었다. 자신에게 친절한 게 최고의 친절이라는 것을. 패밀리데이 첫날, 여느 때와 같이 회사에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와선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그러고는 그동안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던 리움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날이 혼자 미술관에 처음 간 날이었다.


사실 그날의 기억은 희미하다. 일기와 사진으로 남긴 기록을 되돌아보니, 김범 작가님의 <바위가 되는 법>을 보았다는 게 떠올랐다. 특히 영상을 보조로 한 뼈 때리는 작품들이 위트 있고 신선했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이나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을 보며, 결국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각자 의미를 부여한 개념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고/받고 있지 않은가, 반성을 했다. 따뜻한 색감의 캔버스에 텍스트 중심의 작품들도 마음에 들었다. 텍스트를 읽어내고 작품 너머의 것을 내 의식 속에서 바라보며(상상하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09_바위가되는법.jpg 수업을 듣는 사물과 바위가 되려는 인간,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바위가 되는 법, 김범, 2023)


누군가 예술은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비틀어 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예술은, 특히 현대예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시회에 들어가기 전 리플릿을 일단 받아둔다. 전시회에 따라 벽면이나 영상을 통해 설명을 곁들여주는 곳도 있다. 이왕 보는 거 작가와 큐레이터 분들이 준비한 작품 외적인 내용도 가급적 충실히 살펴본다.


그래도 우선은, 제목이나 자세한 설명을 보기 전에 작품 하나하나를 마주하고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먼저 감상하려고 한다. 에포케, 괄호 치고 바라본다. 구체적인 이유는 몰라도 마음에 들어오는 작품은 조금 더 바라본다. 그다음 어떤 걸 표현하려고 했는지 나만의 필터로 상상해 본다. 그러고 나서야 제목과 설명을 찾아본다.


설명을 보고 아!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설명을 아무리 봐도 와닿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기죽지 말자. 내가 느낀 것과 같으면 공감이 가서 좋고, 다르면 해석이 다양해서 좋다는 럭키비키한 자세로 즐겨본다. 어쩌면 맥락을 알면 좀 더 풍부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시대적 배경이 어떻든, 내가 좋다고 느끼면 그만 아닌가 싶다. 예술은 무엇이 맞다, 틀리다의 시험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서일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상주의 그림들을 나 역시 좋아한다. 산업혁명과 빛나는 근대화의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파리의 거리를 캔버스에 담았다. 튜브물감은 화가들을 야외로 빛의 세계로 이끌었고, 기존의 단정하고 형식과 주제를 중시하던 엘리트를 위한 그림이 아닌, 빠른 붓질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그림을 그렸다. 지식을 총동원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그림. 모든 것에 의미가 필요할까?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힘든데, 그저 아름다워서 좋을 수도 있지.



서울에는 미술관이며 갤러리도 많고 다양한 전시가 넘쳐나지만, 지방 소도시에 있으면 어딜 가볼지 고민할 필요 없이 몇 군데로 추려지니 나 같은 초보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평일 낮, 작은 전시회는 마치 나에게 전세를 내준 것처럼 조용하다. 누구도 내 시선을 평가하지 않고, 나는 그저 눈앞에 놓인 색과 형태를 천천히 따라간다. 작품을 모두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오래 바라보고, 어떤 작품은 스쳐 지나친다. 사실 작품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즐기는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시골쥐의 일상은 조금 멋스러워졌고,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든다.



아름다움은 특정한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이 한계를 뛰어넘는 그 순간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다. 당신에게 그런 순간을 선사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일 수 있다. 수학 방정식이, 체조가, 착륙하는 비행기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려면 마음을 열고 보아야 한다. 아름다움이 당신을 찾아오지는 않으므로. 아름다움은 당신이 아름다움을 찾아다닐 때 생겨난다. 아름다움을 찾아냈다면, 멈추어 주의를 기울여라. 아름다움은 무한하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아름다움을 두 번 보지는 못할 것이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비앙카 보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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