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 프렌즈를 다시 만난다

by so


얼마 전 스타벅스 앱을 켰다가 보라색 바탕에 노란색 프레임을 만났다. <프렌즈>*의 팬이라면 모두들 기억할 모니카네 대문! 이벤트 페이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새해를 맞아 특별한 메뉴들과 상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챈들러와 레이첼이 아파트 복도 바닥에 엎드려 주워 먹던 ‘엎어진 치즈케이크’, 잇따른 불행 중 유일한 기쁨이었던 로스의 ‘터키 샌드위치’(일명 “마이! 샌드위치!!”), 조이의 작업 멘트인 ‘How you doin’?’ 머그컵은 이미 품절이고, 피비의 사랑스러운 ‘Smelly cat’ 키링도 눈에 띄었다. 서울의 특정 매장에서만 열리는 팝업 스토어에는 가지 못하는 게 지방인으로서는 아쉬웠지만, 한동안 못 봤던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1994년에 시작해 2004년까지 10개 시즌을 방영한 미국의 “레전더리” 시트콤이다. 뉴욕에 사는 개성 넘치는 여섯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 풋풋한 청춘을 담았다.)


갈등과 서스펜스를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이불을 뒤집어쓰는 어린 아이처럼. 물론 갈등을 무작정 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나의 소중한 쉬는 시간을 들여 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까지 긴장하고 싶지는 않달까. (같은 이유로 놀이 기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흠, 이런 성향이 히마리 없는 음악을 좋아하거나 소소한 일상을 다룬 만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진지한 드라마보다는 만화 같은 스토리가 펼쳐지는 드라마를 좋아하고, 그보다는 언제나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시트콤을 좋아한다. 어릴 적 즐겨 보던 <남자 셋 여자 셋>과 <순풍 산부인과>, 대학생 때 기숙사 휴게실에서 생방을 꼭꼭 챙겨 보던 하이킥 시리즈, 뒤로 갈수록 산으로 가긴 했어도 열심히 본 <How I met your mother>, 남편과 같이 여러 번 돌려본 <빅뱅 이론>. 그중에서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코 <프렌즈>다.



한창 미드의 유행이 시작되던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들은 새로 나온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는데 나는 당시 이미 시즌 10으로 종영한 <프렌즈>를 뒤늦게 보기 시작했다. 기숙사 책상(이자 식탁)에서 혼자 간단히 끼니를 때울 때, 혹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나의 외로움을 다독여주던 여섯 명의 친구들. 그렇게 한 편 두 편 보다 보니 당연하게도 어느새 끝이 나고 말았다.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뀌며 1년간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질 때처럼, 아니 실은 그보다 더 아쉬웠는데, “뭘 아쉬워해, 또 보면 되지.”라는 친구의 명쾌한 해답에 바로 다시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프렌즈>는 외로운 기숙사 생활에 언제나 나의 bgm이 되어 주었다.


딱 떨어지는 완벽함을 좋아하는 나이므로 시즌 1부터 정주행만 셀 수 없이 했고, 어떤 때는 영어 공부를 한다며 대본을 들고 따라 말하기(일명 쉐도잉)를 연습하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예전처럼 드라마 정주행이 어려워졌을 땐, 캐릭터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잡은 시즌 3에서부터 한창 재미있는 시즌 5 사이에서 이것저것 골라 보기도 했다. 걱정이 있어도 삶에 지쳐도 하루의 끝엔 언제나 카페(센트럴 퍼크)에 모여드는 친구들, 그들이 주는 따스한 위로가 필요한 날들이 있었다.




인생 책, 인생 영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딱 하나 고르는 것은 언제나 어렵지만 나의 인생 드라마는 주저 없이 <프렌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고르는 것은 역시 어렵다. 이어지려다 이어지지 못했던 로스와 레이첼이 드디어 이어졌을 때라던가(물론 그 후로도 계속 on and off를 반복하지만..), 모니카와 챈들러가 결혼을 결심할 때라던가,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딱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은 두 편을 골라본다.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꼽자면, 시즌 4의 에피소드 12(The One with the Embryos)가 생각난다. 메인 스토리는 피비가 동생네 부부를 위해 대리모가 되어주는 이야기지만, 병렬로 흘러가는 여자팀 vs. 남자팀의 퀴즈 대결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챈들러와 조이가 모니카와 레이첼에 대해 자신들이 훨씬 더 잘 안다는 주장에, 로스의 심판 아래 상대편에 대한 퀴즈를 맞히는 대결을 시작한다. 내기를 하던 중 승부욕이 발동한 모니카는, 자신들이 이기면 그동안 자신들을 귀찮게 한 챈들러와 조이의 birds(닭과 오리를 반려동물로 키우고 있었다)를 없애는 조건으로 내기의 판을 키운다. 그러자 챈들러는 대신 자기들이 이기면 아파트를 서로 바꾸자는 엄청난 조건을 내걸고, 자신만만한 모니카가 이를 받아들이며 집을 담보로 한 퀴즈 대결이 펼쳐진다. 21년도에 방영한 <프렌즈 리유니언>에서도 재현했던 에피소드이니 아마 많은 팬들이 좋아하는 에피소드일 것 같다. 혹시 시즌 1부터 보는 게 부담스러워 아직 <프렌즈>를 못 보신 분이라면 이 이야기를 한번 봐보시길.


또 하나를 더 고르자면, 시즌 5의 에피소드 14(The One Where Everybody Finds Out)도 추천한다. 모니카와 챈들러의 비밀 연애가 모두에게 들통났던(엄밀히 말하면 다음 에피소드까지 봐야 로스까지 다 알게 되지만) 에피소드이다. 조이만 알고 있던 둘의 비밀을 레이첼과 피비도 알게 되면서, 그동안 자신들을 속인 것에 대한 장난스러운 복수가 펼쳐지는데.. They don’t know that we know they know we know! 챈들러와 모니카가 단순히 들뜬 감정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는, 감동과 재미를 다 잡은 에피소드다.



내가 고른 에피소드들만 봐도, 아무래도 나는 <프렌즈>에서 모니카와 챈들러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와 가장 비슷한 캐릭터가 모니카여서일까. (쓸데없이 진지하고 가끔 ‘설명충’인 면은 로스와 닮았다.) 컵마다 번호를 적어두고 타월을 용도별로 11개의 종류로 분류하는 모니카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닮았다. 게다가 어딘가 우리 남편은 챈들러와 비슷하다. 종종 투덜거리지만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그래서 모니카 같은 나를 잘 받아주는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신혼 때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일주일 간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가 내가 오기 전에서야 부랴부랴 청소를 했는데, 책장의 책 순서나 소파에 쿠션을 두는 위치 같은 것들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날 집을 정리하던 중 모니카를 위해 챈들러가 열심히 청소하던 에피소드가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났다. 타고난 성향상 (나만의) 완벽함을 좋아하지만,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내 세계를 넓혀 주는 사람. 이것 참 멋지네, 하며 같이 좋아할 수 있는 게 많고, 때로는 반대편에 앉아 시소의 균형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 모니카와 챈들러처럼 베스트 프렌드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모니카네 집에 있던 파란색 와인잔이 너무 예뻐서 결혼하면서 똑 닮은 것으로 장만했었지. 그래서 아직도 우리 집 와인잔은 파란색이다. 내가 자신 있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음식이 라자냐와 매시 포테이토인 것도 모니카 덕분이다. (모니카는 특별한 날에 라자냐를 만들고, 땡스기빙에는 여러 종류의 매시 포테이토가 등장한다.) 집에서 푹 쉬는 날엔 잠옷 위에 두툼한 배스 가운을 걸치기 시작한 것도, 크리스마스와 뉴이어로 이어지는 연말연시의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모두 <프렌즈> 덕분이다.


어쩌다 스타벅스 덕분에, ‘항상 나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의 따뜻한 한 마디로 시작하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한다. 남편이 출장을 가서 괜히 외로운 오늘, 덕분에 오랜만에 <프렌즈>를 다시 돌려봐야겠다.



Welcome to the real world. It sucks. You’re gonna love it!

(Monica Geller, Friends S1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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