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서른이 되자마자 내 몸에 내장된 프로그램이 “띠디- 오늘부터 30대다. 흰머리 출격!” 명령을 실행한 듯 잊을만하면 한 가닥씩 올라오더니, 마흔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나 많이 올라왔는지. (“띠디디- 이제부터 속력을 높여라!”) 예전 같으면 보자마자 족집게로 쏙 뽑아버렸을 텐데, 이제는 머리숱이 걱정되어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머님들이 볼륨감 있는 파마를 하시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괜히 거울을 봤다가 팔자 주름이 이렇게 눈에 띄었나 싶기도 하다.
이런 날엔 기분도 전환할 겸 그림책을 본다. 작년에 도서관에서 열린 수업을 들으며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을 처음 접했다. 열정적인 선생님께서는 분명 그림책에 풍덩 빠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하셨는데, 아직 나는 풍덩 빠지지는 않은 것 같다. 우울해서 빵을 샀다는 말에 따스한 위로보다는 무슨 빵을 샀는지가 먼저 궁금해져 버리는 나에게는 너무 말랑말랑한 그림책의 세계. (물론 그렇지 않은 그림책도 있겠지만, 내겐 많이 감성적이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살짝 발을 담그긴 한 것 같다.
오늘은 뽑지 못한 흰머리 덕분에 마침 생각이 나서 『행복한 여우』를 다시 꺼내본다.
어느 숲속에 탐스러운 붉은 털을 가진 아름다운 여우가 살고 있었다. 여우는 열심히 꽃밭도 가꾸고 산책도 하고, 그러다 강물을 만나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종일 털을 다듬기도 했다.
이 숲에 나만큼 아름다운 여우는 없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여우는 깜짝 놀랐다. 여느 때처럼 강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는데 하얀 털이 하나 둘 생겨난 것이다. 흰머리를 몰래 뽑던 내 모습처럼, 여우는 하얀 털을 뽑기도 하고 빨간 꽃과 단풍잎으로 가려보기도 하지만 계속되는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여우는 더 이상 꽃밭을 가꾸지 않았다. 산책도 하지 않고 털을 다듬지도 않았다. 결국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동굴 속으로 혼자 들어가 버린다.
외적인 아름다움만이 전부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조금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요즘엔 스스로를 위해 외모를 가꾸는 것도 하나의 개성이자 행복인데. 아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여우의 아름다운 붉은 털이 돋보이던 시절, 숲속은 온통 흑백이다. 흑백 세상 속 붉은 여우의 모습에서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어린 날의 모습이 보인다. 계속 읽어보자.
시간은 흘러 흘러 계절이 바뀌었다. 동굴 속에도 한 줌 따스한 빛줄기가 들어오고, 흰나비 한 마리가 하얀 여우 곁을 맴돈다. 봄이 와서일까 나비 덕분일까, 여우는 동굴 밖으로 나선다. 그때 작은 새 한 마리가 여우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렇게 눈부시도록 하얀 여우는 처음 보았어. 정말 아름다워.” 여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우는 다시 날마다 산책을 하고, 자신의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제는 알록달록한 세상 속에서 하얀 여우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변과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 숲에 나만큼 꽃과 나무를 잘 가꾸는 여우는 없을 거야.
동굴 속에서 여우는 혼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낯선 변화가 속상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 스스로를 똑바로 마주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새로운 변화(이를 테면 노화)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겠지. 여우는 이제서야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비와 새가, 꽃과 나무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우를 보면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떠올랐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자아도취와 자기 본위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이라는 감방에서 벗어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해 보상받으려 자신도 모른 채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사랑은 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나 자신을 포함하여)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또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요즘 흰머리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든 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한번 가는 우쿨렐레 수업 시간에 배우는 노래들은 예전 같으면 듣지도 않았을 오래된 노래가 많은데, 따라 부르다 보니 인생에 대한 가사들이 꽤 마음에 든다. 편식이 심해서 좋아하지 않던 나물과 버섯이 언제부턴가 고기반찬보다 입맛에 맞고, 부쩍 눈물이 늘어난 것도 그렇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이가 들수록 새롭고 다양한 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러면 이 세상도 흑백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스펙트럼으로 다시 다가온다. 우리 자신도 수많은 가능성들의 중첩으로 존재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실은 나의 한 단면일 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가 과연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작 마흔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습다. 아직은 갱년기도 남았고 오른쪽 어깨의 오십견도 남았다. (왼쪽은 이미 지나갔다.) 가끔은 동굴 속에서 스스로를 마주하는 날들이 또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너무 혼자 오래 있진 않기를, 곁에 있는 나비와 새를 한 번쯤 따라가보기를 바랄 뿐이다. 또,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나비가 되어주고 싶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바람의 노래, 조용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