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햇차 여행을 떠나고 싶다거나, 올해는 시 수업을 들어봐야겠다거나,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어둔 버킷 리스트가 있다. 그런데 그 목록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마라톤이다. (참고로 풀 마라톤을 뛰는 게 목표가 아님을 먼저 밝힌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달리기에 대한 로망은 스무 살 무렵부터 있었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오래달리기를 하면 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걸었던 나로서는 스스로도 신기한 일인데, 이 로망이 생긴 계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쓴 달리기에 대한 글을 읽고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새해 목표에 항상 다이어트가 들어있었던 대학생 시절, 헬스장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러닝머신을 뛰다가 걷다가,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친구(현 남편)를 따라 체육관 트랙을 뛰다가 걷다가, 달리기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엄청 잘 달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번에 고작 3km, 어쩌다 많이 뛰는 날엔 5km 정도를 달렸다.
그러다 과하게 반올림을 하며 10km도 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내 마라톤 대회를 3년 연속 신청하고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전적이 있다. 한 번은 연습을 너무 안 해서 자진 포기, 두 번은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어쩌면 이것도 과연 10km를 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반영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달리기는 점점 잊어졌다. 그러다 한가해진 작년 어느 날, 요즘의 러닝 유행에 편승하여 나도 다시 달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뛰어서인지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분 만에 헉헉대기 시작하더니 3분도 채 안 되어 멈출 수밖에 없었다. 20대 때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3km는 거뜬히 뛸 수 있었는데..
그래서 동생이 추천해 준 런데이 앱을 활용하여 ‘30분 달리기’ 연습을 차근차근 따라가기로 했다. 일주일에 3번씩 8주 동안 인터벌 러닝을 하며, 한 번에 달리는 시간을 1분, 2분 조금씩 늘려가는 훈련이었다. 훈련 프로그램도 좋지만, 숨이 차서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어김없이 “달리세요! 당신은 해낼 수 있습니다!” 나를 응원해 준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달리기에 대한 유익한 정보는 덤이다.
다만 나는 매주 세 번을 꼬박꼬박 뛰지 않았더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힘들어서, 같은 훈련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몇 달에 걸쳐 천천히 늘려갔다. 그래도 결국, 처음에는 1분만 뛰어도 헉헉대던 내가 반년 정도 지나니 정말 30분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저와 같은 초보 러너분들, 런데이 앱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달리기가 좋은 이유는 달리는 동안 (힘이 들어)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고민이 있어도 머릿속에서 다 사라진다. (산책보다 강력하다.) 게다가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내딛는 것만으로도 뭔가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하루키는 달리다 보면 평소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도 뭔가 특별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는다고 했는데, 그 비스무리한 걸려나.
특히 햇살 좋은 일요일, 부채꼴 모양 동네를 둘러싼 천을 따라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달릴 때가 으뜸이다. 겨울 바람이 차가워도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달리다 보면 금세 후끈 열이 오른다. 물론 요즘 같은 날씨엔 털모자와 장갑은 필수다. 지나쳐가는 여사님이 듣고 있던 노랫소리를 머릿속으로 같이 흥얼거리다가, 파란 하늘과 낮에 나온 반달도 구경하고, 지난주까지 꽝꽝 얼었던 시냇물이 조금 녹았네, 저기 길을 막고 있는 고양이가 제때 비켜줄까, 텅 빈 가지 끝에 드디어 꽃눈이 올라왔구나 ··· 흘러가는 풍경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흘려보내며 달린다. 나는 그냥 여기에 있다.
런데이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배 위에 올려둔 북을 둥둥 치는 것 마냥 두 팔을 가볍게 흔들며 하나 둘 하나 둘 발을 딛는다. 물론 달리다 보면 힘이 든다. 나는 꼭 3km를 넘어서는 순간 포기하고 싶어진다. (이 정도 달렸으면 됐잖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야 알았다. 힘이 들면 멈추거나 걷는 게 아니라, 속도를 늦추면 된다. 이제 와서 내 꿈이 세계 제일의 마라토너도 아니고, 굳이 빠르게 달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계속 달리는 것, 느리더라도 리듬을 끊지 않는 것.
올해는 꼭 마라톤을 뛰어보자는 마음으로 작년에 미리 2월의 마라톤을 신청해두었다. 이번에는 20대 때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초보 러너에게 맞는 5km에 도전하기로 했다. 5km를 뛰고 나면 ‘50분 달리기’ 연습을 시작해야지. 아니, 어쩌면 당분간은 계속 5km를 느리지만 꾸준히 달리는 것도 좋겠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천천히 나에게 맞는 페이스대로 늘려가면 된다.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아도 나도 모르게 근육이 붙어있고, 왼발 오른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어딘가에 도착해 있으니까.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 무라카미 하루키)
※ 다음 주에는 여행으로 한주 쉬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