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아버님께서 작년부터 나의 퇴사 기념으로 다 같이 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말씀하셨는데, 미루고 미루다 퇴사한 지 1년이 넘었는데 더 미루기는 그래서 가족 여행을 추진했다. (여행을 싫어하진 않지만 마음먹는 게 귀찮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니 너무 멀리 가기는 그렇고, 가까운 곳은 이미 다들 한 번씩은 가봤고.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다 십여 년 전 학회 참석으로 한여름에 다녀왔던 오키나와가 생각났다. 그때 엄청난 더위와 함께 태풍까지 만나며 다음에 여기 온다면 꼭 여름은 피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좋아, 오랜만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고 싶기도 하고.
처음에는 오래전 한 번 와봤을 뿐인 낯선 곳에서 가이드처럼 길을 안내하고 가족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메뉴를 정하느라, 쉬러 온 여행이 어딘가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하루에 한 군데 정도만 들르고 리조트에서 주로 보낸 덕분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잠깐 혼자 산책을 하고,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며 휴가를 위해 아껴둔 책을 읽고,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멍하니 뒹굴거리고. 여행 중에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왕 낯선 도시에 온 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나와 달리, 아이는 재미있는 것을 하나 찾으면 거기에 푹 빠져 몇 번이고 반복하고(이를테면 수영), 남편은 멍하니 모처럼의 느긋한 휴식을 즐긴다(주로 선베드). 덕분에 가족 여행을 가서도 남편과 아이가 호텔 수영장에서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 혼자만의 여행을 잠깐 떠나기도 한다.
날 때부터 파워 J인 나는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고, 당연히 여행지에서도 미리 생각해둔 일정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오늘은 오전에 K시로 이동해 인기 있는 우동집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냉우동을 먹고, 정원이 예쁘다는 유명한 절에 들러 산책을 하고, 블로그에서 본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고. 어딘가 정해진 퀘스트를 순서대로 해치우며 나아가는 용사 같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여행 계획을 예전만큼 열심히 세우지 않는다. 어디서 묵을지는 미리 예약해두고 가기에(여행에서 숙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 대략의 동선을 고려하고자 여행지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해두지만, 가보고 싶은 장소들을 구글 지도에 저장만 해두고 떠난다. 스마트폰 덕분에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아침을 먹으며 오늘 무엇을 할지 정해도 충분하다.
이건 다 나와는 반대로 뼛속까지 P인 남편 덕분이기도 하고, 몇 달 전부터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맛집멋집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다행히 디저트 가게들은 대부분 예약까지는 필요 없으니.) 그리고 그동안의 여행에서 다른 사람의 블로그나 여행 책자에서 추천해 주는 경로를 따라가는 것보다도, 우연히 낯선 골목을 헤맸던 기억들이 더 오랫동안 남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친구와 함께 한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리기산 중턱에 있는 산장 호텔에서 맞이한 새벽의 기억이다. 5월의 봄날 눈을 맞으며 뜨끈한 스파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 늦은 시간까지 친구와의 수다로 마음속까지 따뜻했던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전날 호텔 근처에 산책로가 있다고 들어서 친구가 잠을 자는 동안 혼자 새벽 산책을 나섰다.
아직은 어둑한 새벽,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숲길을 홀로 걸었다. 바람마저 불지 않아서 뽀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만 들렸다. 한동안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낡은 놀이터를 지나치다 미끄럼틀 위에 고양이 발자국이 보였다. 나 혼자는 아니구나, 괜히 안심이 되었다. 산 아래 경치를 구경하려고 벼랑 끝의 울타리로 향하는데, 그만 발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도 아프고 장갑과 바지가 젖었지만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을 털어내고 울타리 앞에 섰다. 눈앞에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과 하얀 구름이 펼쳐져 있다. 갑자기 구름이 살짝 걷힌다. (산속의 날씨는 정말 알 수 없다.) 해가 뜨는 곳의 반대쪽 산들이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물든다. 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남편과 아이도, 회사에 돌아가면 해결해야 할 복잡한 일들도, 모두 잊은 채 오로지 산과 나만 있었다. 문득 지금이 이번 여행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은 언제나 카메라에 오롯이 담을 수는 없다.
코로나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굳이 먼 나라까지 여행을 갈 필요를 예전만큼 못 느낀다는 것이다. 이제는 남들이 다 가는 곳에 나도 가보고 싶던 이십 대 때처럼 명소를 둘러보는 편도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장거리 여행이 피곤하기도 하고. 결국 낯선 도시에 가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것이라,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풍경이 좀 익숙지 않고 일상의 잡다함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평범한 날에도 가끔은 낯선 길로 가본다. 여행이 일상을 벗어나는 거라면, 익숙한 동네에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늘 가던 길에서 약간 벗어나기만 해도 우리 동네가 생경해진다. 평소에는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을 걷고,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예쁜 꽃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아기자기한 가게를 구경한다. 버스를 타고 이웃 동네로 훌쩍 떠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건 못다 한 집안일이나 간밤의 불안 같은 건 잠시 접어두는 것.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처럼 말이다.
여행을 가면 꼭 노을이 예쁘다는 강둑이나 해변을 들른다. 이번에는 마지막 날 묵은 온천 호텔에서 노천탕에 몸을 푹 담근 채 낮과 밤의 경계를 즐겼다. 십여 년 전 오키나와에 갔을 때도 아메리칸 빌리지에 있는 선셋비치에 들러, 편의점에서 산 애매한 맛의 사타안다기를 먹으며 떠돌이 고양이와 함께 오렌지빛 하늘을 보았다. 그런데 사실 노을은 집에서도 매일 볼 수 있다. (우리 집은 남서향이라 노을 맛집이다.) 여기가 어디든 누구와 함께 있든, 매직 아워는 찾아온다. 결국 내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지에 달렸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의 의미,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