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색을 딱 하나 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색깔은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에 있듯이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과 파랑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해두자. 그래도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는 하늘색을 좋아한다.
그런데 하늘색은 도대체 어떤 색일까. 초여름의 여릿한 푸른색과 쾌청한 가을 하늘, 한겨울의 시린 파랑은 엄연히 다르다. 어디 그뿐인가. 새벽녘의 감색 하늘과 이른 저녁 서쪽 하늘, 구름 낀 회색 하늘도 있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을 고르는 것 역시 어렵다.
굳이 또 하나만 꼽으라면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어릴 적 좋아했던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닮은 달짝지근한 하늘색을 고를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늘의 색이 파랑이 아니었다면 난 그 하늘색을 가장 좋아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지금의 하늘색을 가장 좋아했을까?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고르는 일은 참 어렵다. 여러 가지 중에서 이건 내 취향이고 저건 내 취향이 아니라고 판별하는 것은 그럭저럭 쉽지만,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한데 모아놓고 가장 좋아하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좋아하지만 왠지 글로 쓰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만화든 애니든, 드라마든 영화든, 다양하게 관심을 갖고 있지만 결국엔 좋아하는 것을 보고 또 보는 편이다. 그래서 비교적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는 게 어렵지 않다.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요츠바랑!』, 가장 좋아하는 애니는 『허니와 클로버』(이건 만화나 영화보다 애니),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프렌즈』,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데 일단은 『안경』.
한편,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건 언제나 어렵다.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책이 너무나 많고 아직도 읽고 싶은 책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에(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새 책이 쓰이고 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읽은 횟수로만 치자면 어릴 적 푹 빠졌던(불과 얼마 전에도 아이와 함께 완독한) 『해리 포터』 시리즈를 꼽아야겠지만. 계절마다 다른 하늘색처럼 좋아하는 책도 조금씩 달라진다.
헤르만 헤세
이십 대에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가장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제일 고민도 많고 불안했던 시기였다. 공부만 열심히 해도 되던 학생 때는 큰 고민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는데, 막상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니 이제부터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어정쩡한 마음으로 미국 유학을 가려고 GRE 준비를 하다 접었다. 그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과학자로 살아가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 좀 더 필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채 차선책으로 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는 모두 내 인생에 필요한 일들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때는, 데미안처럼 자기만의 세계로 성큼 나아간 싱클레어보다도, 피곤하고 지친, 끝까지 성실하기만 했던 한스에게 더 공감했다. 비슷한 느낌으로,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 마냥 『호밀밭의 파수꾼』도 좋아했다. 지금도 여전히 헤세를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엔 『싯다르타』를 더 즐겨 읽는 것 같다.
김애란
어떤 책이 좋을 때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다도 마음에 꽂힌 한 문장이 이유일 때가 더 많다. 가령 ─ 지구축처럼 사람을 향해 십오 도쯤 기울어져 있던 마음 ─ 처럼. (스물 다섯의 일기 中)
이야기의 힘에 이끌려 책장을 얼른 넘기고 싶은 책도 좋아하지만, 보통은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한참을 붙잡고 있는 책을 더 좋아한다. 과거의 일기를 뒤적이다 보니 이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소설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하고,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책도 좋아하고, 요즘에는 시집도 종종 읽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를 수가 없는데(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 그래도 작년에 읽었던 책들 중에 좋았던 책을 손에 꼽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단편집을 낸 김애란 작가님의 『안녕이라 그랬어』. 신기하게도, 이십 대의 나는 좁은 기숙사 방에서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를 읽으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면, 여기에는 어느덧 마흔이 된 내가 고민하거나 이상하다 느낀 것들이 담겨있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쩌면 가장 많이 하는 돈 이야기, 그러면서도 외면하거나 숨기고 싶은 속물적인 것들. 뜨끔했다.
『음악 소설집』에서 먼저 읽었던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에서는, ‘큰 교훈 없는 상실, 삶은 그런 것의 연속’이라는 말에 위로 받았다. 퇴사와 이별이라는 전혀 다른 상황임에도, 은미 대신 눈물 흘리며 뒤늦게 밀려온 상실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떠한 감정이나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서 나도 잘 모르고 있다가, 그걸 딱 텍스트로 마주하였을 때, 그제야 이런 거였구나 깨달을 때가 있다. 혹은 알면서도 슬며시 모르는 척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있고.
요즘엔 침대 머리맡에 시집을 두고 읽다 자는데 그게 참 좋다. 처음에는 국어 시험지를 마주한 것처럼 시인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정답을 맞히려 하다 보니 재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마음에 와닿는 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읽는다. 오히려 정답이 없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무엇이든 괜찮은 다정함이 있어 좋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김은지 시인의 시에는 일상의 틈에서 솟아난 것 마냥 위로가 되는 따스함이 있다.
철학자들은 실재(Reality)와 현상(Appearance)을 구분한 플라톤의 관점을 여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에서 리처드 로티는 철학이 실재의 본질을 찾는 특별한 학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철학은 사실 우리가 세계를, 혹은 스스로를, 다르게 이해하도록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일 뿐, 거기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적 상상력이다. (이것도 참 다정하지 않은가?)
로티에 따르면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서사를 다시 쓰는 존재이다.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와 언어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의 범위를 결정한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잠깐이나마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과 고통을 공유하며, 거기서 또 나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나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진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라도 누군가의 글에 힘을 얻고, 또 언젠가 내가 다른 이에게 다시 힘을 나눠주며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
(여름외투 中, 김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