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즐거울 만큼만
나는 무언가에 푹 빠져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소위 말하는 덕질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몰입하는 순간이 있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처음 접하고는 물건 비우기와 리스트 만들기에 한참 몰두했었고 (지금의 방향성과는 조금 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밤을 새워 공부할 정도로 열을 올렸던 회사 프로젝트라던가, 아르센 뤼팽에 빠져 최초로 어린이실을 벗어나 엄마 회원증으로 일반 자료실의 전집을 모조리 읽던 시절까지. 하지만 이런 불꽃같은 열정은 늘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은은하게 빛나는 별빛처럼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들이 있다. 독서, 산책, 요가, 차 마시기 같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게 해 주는 것들. 그런데 요 몇 년간은 이런 소소한 즐거움보다도 ‘일’을 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와 가족의 안녕을 뒤로하고 일을 최우선으로 두는 동안, 내 안의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갔다. 처음에는 일도 활활 타는 불꽃처럼 푹 빠져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임감’이 동력이 되면서 재미를 잃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엄마는 나랑 동생만 집에 남겨둔 채 잠깐 외출을 할 때면 우리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비디오를 틀어주셨다. 가끔은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새로운 만화일 때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본 건 아마도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방영할 때 녹화해 두었던 것을 우리는 질리지도 않은 채 보고 또 보았다. 도레미송을 비롯해 많은 명곡이 있지만, 나는 천둥번개가 치는 밤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불러주던 ‘my favorite things’를 특히 좋아했다.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 책만 읽기에는 심심해서 글을 써보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그때 왠지 이 노래가 떠올라서 무턱대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리고 그동안은 그저 좋다, 재미있다는 말로만 단순히 표현하고 말았던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분명하게, 나만의 글로 써보고 싶기도 했고.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공원 벤치에서 광합성하기, 바람 솔솔 불어오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깜빡 드는 낮잠. 아무런 할 일도 연락도 없는 주말 소파에 파묻혀 책 읽기, 그때 먹는 초콜릿. 라벤더 향 가득한 욕조에서 마스다 미리 만화책 보기, 잠들기 전 싱잉볼 연주 들으며 요가.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일기 쓰기, 사실 커피보다 좋은 건 같이 시킨 케이크. 소중한 이들과 함께 보내는 조금은 시끌벅적한 금요일 저녁, 치킨보다는 피자, 맥주보다는 와인. 언제 어디서든 산책은 좋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나 홀로 도서관 산책, 화려한 꽃다발보다는 길가에 핀 작은 꽃들, 이왕이면 파란 꽃들 ─ 가령 봄까치꽃이나 수레국화. 아이가 잠든 밤 남편과 나누는, 내일이면 기억도 안날 시답잖은 이야기, 매일 아침 이불 속에서 나오기 직전 아이와 꼭 끌어안고 있는 순간.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단하고 거창한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작고 소소한 것들, 대신 에너지를 쓰기보단 채워주는 것들이다. 항상 바라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한 나로 사는 것. 그렇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지나간 어제를, 오지 않은 내일을 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는 것들을 좋아한다. 문득 당신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작은 것이라도 좋다. 아니, 작은 것일수록 좋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당장 한다. 특별히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딱 즐거울 만큼만.
따뜻한 물로 목욕하기, 갓 구운 빵 한 조각, 친한 친구와 나누는 대화, 한밤의 깊은 단잠. 이런 것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은 세상의 칭송도,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큰 기쁨’만 좇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범한 것을 폄하하는 낭만주의적 시각을 물려받아, 독특하거나 손에 넣기 어려운 것, 이국적이거나 낯선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은근히 값비싼 것을 선호한다. 가격이 싸거나 무료이면 그만큼 의미나 감동도 적을 것이라 여긴다. 언젠가 높은 만족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엄청난 계획과 구상에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간다.
소소한 즐거움은 보다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고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것을 즐기는 데에는 엄청난 자원이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희귀한 경험도 아니고, 전문가만 가능한 경험도 아니다.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의외로 사소한 점에 있다. 바로 우리가 그것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소한 즐거움, The School of Life)
단순하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다 보니 어느새 20회로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어쩌면 재미없을지도 모르는, 개인적인 취향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조만간 또 다른 소소한 이야기들로 찾아뵙겠습니다 :-)
- 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