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마리 없는 음악을 듣는다

by so


평소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 요즘에 매주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바로 <싱어게인>. 이제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역사도 꽤 길어졌는데,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매번 새로 나오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케이팝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한국인들이지만 참 흥겨운 민족이구나 싶기도 하다. (아, 그래서 노래도 열심히 하는 건가?)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밴드에 들어갔고, 친구 따라 놀러 간 음감실에 한눈에 반하여 음악감상 동아리도 들었다.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밴드 친구들이랑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학식을 먹고 동방에서 늦은 밤까지 공연 연습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던, 청춘의 가장 빛나는 한 소절.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척 착실하다.) 다만 아쉽게도 무대에서 내가 아끼는 푸른 새벽 같은 노래들은 거의 부르지 못했다. 축제나 정기 공연 때는 아무래도 신나는 음악이 어울리기도 하고, 이제 막 밴드를 시작해서 각자의 악기에 푹 빠진 친구들은 잔잔하고 어쿠스틱한 노래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렇다. 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히마리 없는 음악을 좋아한다. 경상도발 급한 성미를 가진 나는 목소리도 크고 언제나 덜렁거리지만, 다도, 독서, 산책 등 왠지 차분한 취미를 가졌다. 좋아하는 노래들도 한 톤 다운된 느낌이다. 메이저 코드보단 마이너 코드가 어울리는 노래들, 다 같이 떼창을 하기보다는 혼자 방구석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들. 음악감상 동아리에서는 돌아가면서 그날의 DJ가 되어 세미나를 열었는데, 내 차례엔 언제나 졸린다는 평이 많았다. 아니,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 안에서 희로애락이 다 있고, 가끔은 흥에 겨워 춤을 출 때도 있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


그 시절 주로 듣던 음악은 굳이 분류하자면, 두루뭉술하게 묶을 수 있는 모던록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다. 90년대와 2000년을 전후로 인기 있었던 얼터너티브, 그중에서도 약간은 우울하고 서정적인 브릿팝(예를 들면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그리고 내 사랑 트레비스; 엄밀한 분류는 생략합니다)을 비롯해, 동아리 선배들이 세미나가 끝나고 구워준 믹스 CD에서 알게 된 인디밴드들을 주로 들었다. High and dry 하던 겉멋 든 스무 살의 불안을 달래준 <버스, 정류장> OST, 누군가 곁에 있어도 쓸쓸했던 나의 어깨를 감싸준 담요 같은 노래, 우주를 두둥실 떠다니는 마냥 잠 못 들던 밤 위로가 되어 준 (fake) fake traveler.


그러고 보면 어딜 가든 MP3 CDP부터 챙기던 청소년 때부터 스웨터나 언니네이발관, 델리스파이스 같은 한국 밴드들을 좋아했다. 아직은 또래 문화에 끼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나는, 밖에서는 E의 페르소나를 쓴 채 H.O.T.의 하얀 풍선을 흔들어대고, 혼자서는 ‘멍든새’와 ‘항상 엔진을 켜둘께’를 들으며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했다. 조금 더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즐겨 부르는 동요도 ‘노을’이었고, 좋아하는 캐롤마저 ‘징글벨’이나 ‘울면 안돼’보다는 ‘실버벨’과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으니, 어쩌면 히마리 없는 음악 취향은 날 때부터 타고난 건지도 모르겠다. 사주에 불이 필요해서 이름 두 글자에 모두 불과 빛이 들어갔다는 내 타고난 천성이, 사실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담담한 것일지도 모른다.


06_그시절.jpg 글을 쓰는 동안 오랜만에 꺼내 들은 추억의 노래들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며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한동안 플레이리스트를 업데이트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바빠도 차 한잔할 시간, 노래 한곡 들을 시간은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Kings Of Convenience의 새 앨범이 나온 줄도 모른 채 ‘멋쟁이 토마토’를 열창하고, 아이가 크고 나서는 드라이브를 갈 때 아이의 취향 따라 아이브 노래를 함께 들었다.


그러면서 음악은 점점 더 배경으로 밀려났고, 일하는 동안 버즈를 꽂고 들어도 무리 없는 음악들을 찾다 보니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나를 돌볼 에너지가 바닥났던 시기에는 가사를 듣고 이해하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아니, 그땐 그냥 지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싫었던 것도 같다. 물론 이놈의 취향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건지, 나는 클래식도 히마리 없는 곡들을 주로 듣는다. 웅장한 스케일의 오케스트라보단 소규모 실내악이나 피아노 소품집 위주. 회사 가기 싫은 출근길, 나를 응원해 준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는 어딘가 화려하지 못했고, 일하면서 자주 들었던 아렌스키의 ‘작은 발라드’도 감미롭지만 쓸쓸하다.


생각해 보면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보통은 가사보다는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온 노래를 좋아한다.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어서, ‘음.. 그냥 멜로디가 좋아’, 라고 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 굳이 변명해 보자면, 음악을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음악이 필요 없지 않을까. 화려하진 않지만 반짝이는 윤슬 같은, 히마리 없는 음악에 힘을 얻는다. 특별한 일은 없어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매일을 사랑하는 것처럼.



덧붙이자면, 사실 내가 노래를 출중하게 잘해서 밴드 오디션에 합격한 건 아니었다. 보통 보컬은 한 해에 한 명만 뽑지만 그 해엔 두 명을 뽑아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선배들에게 들으니 나를 뽑을지 말지를 두고 의견이 많이 갈렸었단다. 실력은 어중간한데 음악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정말 밴드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뽑았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인지 나도 다시 노래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 오랜만에 목소리에 위로를 받은 61호 가수님을 응원하고 싶다.



어딘가로 향하는 버스에서 들려오던 소녀의 웃음과
함께 흘러든 세월이 잠드는 소리
꿈꾸지 않아도 얼어붙은 거리를 나른히 만든
소녀의 그 웃음, 언젠간 누군가의 미소가 되겠지

오후가 지나는 거리, 창문에 비친 어설픈 내가 흐르던
오후가 지나는 거리, 잠이 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누구나 어디서든 잠들 것 같던 오후

(오후가 지나는 거리, 푸른 새벽)


※ 유튜브 링크는 PC에서만 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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