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싫어하지만 다행히 걷는 걸 좋아한다. 걸어서 30분 정도라면 당연히 걷고, 1시간 이내의 거리는 날씨가 좋으면 걸어가는 편이다. 나는야 시간 부자니까. 꼭 어딘가로 향하는 길이 아니어도, 산책을 좋아한다. 공원이나 숲길을 걷는 것도 좋고, 익숙한 동네 골목길을 여행자처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흠,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회사를 다닐 땐 출퇴근길 산책이 평일의 유일한 운동이었다.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 25분. 애써 지름길로 빨리 걸으면 20분 만에 갈 수도 있지만, 일부러 가로수가 멋진 길로 돌아가며 30분씩 산책을 하곤 했다.
걷는 게 좋은 이유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일단 걷는다. 걷다 보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어느 날은 논리정연한 철학자의 사색 같을 때도 있지만, 눈앞에 바뀌는 풍경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엉켜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산책이 끝날 즈음엔 불편했던 감정이 왠지 모르게 사라지곤 한다. 단순히 일광욕의 효과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인 취미로 서양 철학을 입문자 수준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최근에 기회가 생겨 칸트 강독 수업을 듣고 있다. 물리학은 뉴턴이 세워둔 틀 안에서 자라나 아인슈타인 이후 새로운 테두리로 옮겨갔지만, 철학은 여전히 칸트가 정립한 틀 안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꼭 들어보고 싶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교수님께 물었다. 요즘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대중적인 책들도 많이 나오고 인기가 많은데, 왜 칸트는 그런 책이 별로 없나요. 한평생 칸트를 연구하셔서 그런지 어딘가 칸트를 닮은 교수님은, “그러게, 왜 칸트가 인기가 없을까요”, 되물으셨다.
산책길에 칸트를 떠올리다 문득 알 것도 같았다. 늦은 나이에 교수가 된 이후 엄격한 생활 습관을 유지한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칸트는 어딘가 너무 완벽해서 따라가기 벅차다. 그의 엄격한 루틴도 그렇고,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라니.. 정말 멋지면서도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철학적 틀을 배우기 위해서 칸트를 읽어야 하는 건 알겠지만, 오히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더 와닿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칸트도 좋아하고, 교수님의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 영향을 받아서인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보다 훨씬 친숙하다. 칸트가 최고선을 향한 무한한 전진을 말한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의지’의 세계이자, 그 의지가 드러난 ‘표상’의 세계이다. 의지는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맹목적인 힘이고, 파도가 오고 가듯 삶의 여러 일들은 무심히 일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의지의 움직임에 희로애락을 겪느라 고통스럽다. 이러한 의지의 맹목성, 즉 이유 없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고통이 멈춘다.
걷다 보니 최근에 다시 읽었던 『싯다르타』가 생각났다. 헤르만 헤세가 이야기한 ‘강’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닮았다. 모두가 강물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면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긴다. 희로애락이 모여 이 세상을, 생명의 노래를, 사건의 강을 이룬다. 싯다르타는 의지의 맹목성을 깨닫듯 운명과 싸우는 일을 멈추고 강의 소리를 듣는다. 동고동락의 마음으로 가득 찬 채, 강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가 된다. 그러고 보면, 헤세도 방랑을 좋아했고 쇼펜하우어 역시 푸들을 데리고 매일 산책을 했다.
칸트를 생각하다가 쇼펜하우어로, 다시 싯다르타로 이어져도, 정작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교수님이 알려주신 ‘즐거움의 공식’이 떠올랐다.
즐거움 = 성취 / 욕망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항상 무언가를 더 성취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욕망을 줄이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칸트를 닮은 교수님도, 불교의 금욕과 닿은 말을 하셨다.
결혼하고 취직하고 아이 낳고, 게임의 퀘스트를 수행하듯 단계별로 얻어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은 아닐 터이다. 아무리 봐도 나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진 못할 것 같으니, 지금처럼 가끔씩 자연과 예술에서 평안을 얻고, 철학을 탐구하며 이데아에 조금이나마 닿으려 해보고, 금욕까진 아니지만 미니멀을 추구하며 눈앞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좋은 인생 아닐까.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은, 생각이 배경이 되어 점점 사라지는 그 순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가지 끝에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내 앞에 뒤뚱뒤뚱 걸어가는 코기 엉덩이, 떨어진 은행에서 올라오는 구수한 꼬린내. 이런 것들에 한눈이 팔리다 보면, 점점 머릿속 생각이 사라진다. 역시 고민해도 답이 없는 문제는 고민하지 않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흔히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청소년기부터 시작되고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 칸트라면 어떤 답을 줄까? 아마도 "진짜 나를 찾으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라고 하지 않을까. … 나는 나일 뿐이다. 누구처럼 잘생긴 유전자를 타고나지도 못했고, 머리가 천재적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무언가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지금의 내가 그냥 나인 것이다. 그거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진다. 누구의 인생을 따라 하면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하기에는 소중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칸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물 자체는 아무도 모른다. 현상만 알뿐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현상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평생을 산다. 인생 역시 정답은 없다. 내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어제는 맞았는데 오늘은 틀릴 수도 있다. 내 마음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 말이 맞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 인생은 넓고 넓은 우주에 단 하나뿐이다. 찰나의 순간, 이 소중한 삶을 빛나게 해 줄 사람 역시 나 자신뿐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 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