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15년차, 머리 서기에 도전하다

by so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굳이 좋다, 싫다의 이분법으로 나누자면 팔 할의 확률로 싫다를 고를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꾸준히 해온 운동이 있다. 제목에서 이미 드러났듯, 요가를 시작한 지 대략 15년이 넘었다. 꽤 오랜 기간 요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코로나로 중간중간 쉬었다는 핑계를 대며, 여전히 스스로 ‘초보 요기’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마치 운전면허를 딴 지 10년이 넘어 면허증을 갱신하고, 한동안은 내 소유의 수동 차량을 몰고 다녔음에도, 항상 초보 운전인 것과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운전은 (절대) 싫어하고 요가는 좋아한다는 것.



나의 첫 요가 선생님은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도사님 포스를 풀풀 풍기시던 할아버지였다. 처음에는 요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방순이를 따라 동네에 하나뿐인 요가원에 갔다. 지금은 요가가 멋진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유행하지만, 그때는 아직 낯선 운동이었다. 요가라 하면 스트리트 파이터의 달심이나, 발을 올려 목에 거는 유연한 동작 같은 걸 떠올리던 시절이다. 그래서 체력장에서 윗몸 앞으로 굽히기(요가의 파스치모타나사나)를 가장 못했던 나는, 뻣뻣한 몸을 쭉쭉 늘려줄 겸 따라나섰던 것도 같다.


요즘에는 빈야사(호흡의 리듬을 따라 동작들을 흘러가듯이 연결하는 요가), 아쉬탕가(수리야 나마스카라를 기반으로 정해진 시퀀스를 수련하는 요가), 혹은 플라잉 요가나 힐링 요가처럼 다양한 수업을 골라 듣는 요가원이 많지만, 인도 느낌이 물씬 풍기던 그 요가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아사나(육체 수련을 위한 자세, 동작)와 호흡에 집중하는 하타 요가를 배웠다.


도사 선생님은 수련에 들어가기 전 짧게라도 명상 시간을 꼭 가졌고, 덕분에 아사나 외에도 호흡이나 만트라 ─ 신성한 말, 예를 들어 우주의 소리라 일컫는 ‘옴’ 등을 반복해서 소리 내는 것 ─ 같은 여러 가지 명상법도 배울 수 있었다. 명상은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것이다. 누군가는 연꽃, 누군가는 호흡, 누군가는 ‘옴’에 집중하며, 피어오르는 생각을 흘려보내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마음 챙김이라는 것을 도사님께 배웠다. 대학원을 다니며 끊임없이 방황하던 그 시절, 요가는 그렇게 나의 체력뿐 아니라 마음의 근력도 길러주었다.


시간이 흘러 회사에 다닐 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에 벼락치기 하듯 요가를 다녔다. 주말부부의 평일은 너무 바빠서 주 2회를 채우려면 어쩔 수 없었는데, 그마저도 남편이 금요일 늦게 올라오는 날에는 토요일 하루만 겨우 나갔다. 그렇게 이어온 나의 요기니 생활. 은퇴 후 이사 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아이의 영어학원도, 집 근처 맛집도 아닌 꾸준히 다닐 요가원이었다. 느리게 살기 시작한 요즘엔 아침마다 요가원에 나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요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많지만, 그중 하나는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겨야 재밌는 구기종목은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요가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속도, 각자의 몸 상태에 맞춰 대체할 수 있는 동작이 늘 있다. ‘어떤 방향으로 힘을 주는지’가 중요할 뿐, 꼭 선생님과 같은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


가끔 선생님은 “숙련자분들은 여기까지 해봅시다”라며 어려운 아사나를 제안하신다. 그럴 때면 나는 아직 숙련자가 아니라고, 무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굳이 도전하지 않는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무리한 동작을 시키시진 않는다. 다만 지금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단지 귀찮고 하기 싫어서 제대로 안 하는 경우엔 (인내심이 부족한 나처럼 말이다), 귀신같이 알아채시고 자세를 바로잡아 주신다.


단순히 서있는 동작인 타다 아사나(산 자세)만 해도 곧게, 똑바로 서있기 위해서는 온몸에 힘을 유지해야 한다. 왜, 무의식적으로 힘을 빼고 서있을 때면, 자연스레 목과 배를 거북이처럼 앞으로 쭈욱 내밀게 되지 않는가. 요가는 원하는 자세에 도달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힘을 채우고 견뎌야만 한다.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약간의 고통이 뒤따르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수련 중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발라사나(아기 자세)를 하거나, 수련의 끝에 들어가는 사바사나(송장 자세)를 제외하고는 항상 힘이 든다. 흠,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아기) 죽기 전까지(송장) 계속해서 고통의 연속인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인 듯도 하다.


아사나2.jpg 단순해도 힘이 필요한 타다 아사나, 그리고 힘을 빼는 아기와 송장 자세


이렇게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나지만, 15년을 넘게 하다 보니 드디어 살람바 시르사 아사나, 일명 머리 서기에 성공했다. 그렇다, 지금 이 글은 사실 머리 서기에 성공한 기념으로 쓰는 것이다. 운동 신경이 좋은 분들은 요가 한 달 차에도 성공하곤 하는데, 심지어 요가를 배운 적도 없는 우리 남편도 하는데, 15년 만에 성공한 것도 자랑이라고 쓴다.


올해 초 나름의 신년 목표를 세우면서, 우르드바 다누라(뒤집어 몸을 일으키는, 위로 향한 활 자세)와 시르사 아사나를 성공하는 걸 목표로 잡았다. 그동안은 남들이 다 한다고 나도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며 어려운 아사나는 아예 도전할 생각조차 않았었는데, 이제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갑자기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우선 팔힘이 부족해서 절대 안 될 것 같던 우르드바 다누라를 상반기에 먼저 성공했다. 사실 알고 보니 팔이 아니라 엉덩이와 다리에 힘이 부족한 것이었고, 선생님이 기초 공사를 하듯 차근차근 대체 자세들부터 꾸준히 연습시켜준 덕분에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


그러자 용기를 얻어서인지 무섭기만 하던 머리 서기도 왠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마음의 문제였던 것일까. 되든 안 되든 매일 한 번씩 연습을 시도했더니 머리 서기도 성공하고 말았다. 사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니까 계속 성공했다. 처음에는 앞에 벽이 있어야만 안심을 했는데, 이제는 당당히 허공에서 물구나무를 우아하게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 흔들리다 넘어지면 구르면 되지.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목표가 필요한 걸까? 목표와 욕심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머리 서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목표를 잡고 애쓰다 보면 성공하지 못했을 때 실망도 클 테다. 결국 그 사이의 발란스를 찾는 게 중요하다. 눈앞의 권태를 없애 줄 작은 목표 한두 개,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 약간의 성취, 요가 15년 차에 머리 서기에 도전하는 것 같이 말이다.


아사나.jpg 올해 목표였던 우르드바 다누라와 시르사 아사나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은 굳어있는 몸 구석구석을 주욱 늘려주고, 또 반대로 조여주며 기름칠을 한다. 안 하던 동작을 오랜만에 하는 날엔 다음 날 아침, 내 몸에 이런 근육이 있었구나 생생히 느껴질 만큼 아프기도 한다. 하지만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근력이 생기고 절대 안 될 것 같던 자세가 되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 몸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혹시 어떤 운동을 할지 고민 중이라면 가까운 요가원에 가보는 건 어떨지?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위로받기도 하고, 평온한 음악과 싱잉볼 소리에 자연스레 이너 피스를 찾게 되는, 요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나마스테-



요가는 신체 운동이라기보다 마음과 생각의 연습에 가까운 것 같다. 요가를 한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일깨우는 일과 같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익숙해질 수는 있다. 그리고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다. 요가 수업은 스스로 고통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잠깐 죽었다가, 문득 눈을 뜨고 다시 밖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른 운동도 비슷할 것이다. 다만 요가에는 가벼운 죽음의 의례, 사바사나가 반드시 있다.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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