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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민 김소영 Jun 01. 2022

호들갑

 벽 시계는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새벽, 흥건해진 등짝과 축축해진 온몸은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 눈을 뜨게 할 정도의 열대야를 실감 나게 했다. 타이머를 맞춘 선풍기는 멈춰있었고 열어 둔 창문에는 한 점의 바람도 없었다. 이미 달아난 잠에 아쉬운 바람 한 점을 찾아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문 밖은 고요하기만 했다. 

 집은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서는 제법 큰 골목 어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드나드는 동네 사람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골목 어귀에는 큰 슈퍼와 작은 카페, 식당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한참을 머무르기도 해서 처음엔 시끄럽고 거슬렸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의 집 창문은 동네 소식을 전해 듣는 통로이기도 했다.

 

 고요하던 골목으로 검은 SUV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는 곧 큰길과 골목을 잇는 하천 다리 맞은편에 주차를 했다.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리고 뒷자석에서 또 한 사람이 내렸다.

어, 뒷자리에서 내린 사람은 빨간 벽돌집 5층 남자였다. 그와 나는 옥상 아래 5층 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온 후 동네에서 마주치기 전 서로의 창문과 옥상을 통해 앞면을 텄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대리기사인 듯 빨간 벽돌집 5층 남자에게 고개 인사를 하고 큰길 쪽으로 사라졌다.  대리기사가 사라지자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자신의 차 운전석에 탔다. 종종 늦은 시간, 새벽에 들어오는 그가 대리기사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주기 싫어서인지 하천 맞은편에 차를 세우게 하고 빨간 벽돌집까지 짧은 거리를 직접 운전했었다.  

선풍기를 틀어 창 쪽으로 돌리면서도 눈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빨간 벽돌집 5층 남자가 안전밸트를 매고 있는 것이 열린 운전석 차창으로 보였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틀거리며 술 취한 남자가 그의 차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술 취한 남자는 운전석 차 안을 살폈고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술 취한 남자는 주먹으로 5층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모습에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야? 이 자식이 미쳤나."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화가 많이 났는지 소리를 크게 질렀고 그 진동이 온 동네에 퍼졌다. 아마도 술 취한 남자는 빨간 벽돌집 5층 남자와는 아는 사이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는 바로 차에서 내려 술 취한 남자를 향해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젠틀해 보이던 그는 사라지고 야수 한 마리가 먹이를 덮치듯 맹렬했다. 술에 취한 남자는 결국 쓰러졌고 쓰러진 남자를 이제 그는 발로 마구 찼다. 저러다 사람 죽이겠다는 생각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빨간 벽돌집 5층 남자가 손을 넣었다. 

 설마 술 취한 남자를 들어 하천 밑으로 떨어뜨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가끔 마주치면 얼굴에 미소를 띄며 목 인사를 건네던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없었다.

신고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찾았다. 충전기 코드를 뽑아 들고 창밖을 살피는데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힘에 부치는지 다행히 술 취한 남자를 들지 못했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술 취한 남자의 다리를 들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들지 못했다.

그때 골목 안쪽에서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또 한 남자가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 저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보던 아저씨인데 누구더라?

아저씨를 본 빨간 벽돌집 5층 남자는 주춤거리더니 술 취한 남자에게서 손을 떼고 자신의 차로 슬금슬금 향했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아저씨는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다가 그쪽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살어. 처맞기 싫으면."


 그나저나 저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아저씨는 누구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빨간 벽돌집 5층 남자의 차는 빨간 벽돌집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아저씨는 쓰러져 있는 술 취한 남자를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큰길 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정말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핸드폰을 켜는데 술 취한 남자가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맞고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제야 여기저기가 아픈지 고통스럽게 끙끙거렸고 겨우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고 애꿎은 나만 남았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부여잡고 의자를 끌어다 털썩 주저앉았다. 자다 일어나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한참 멍하니 창밖 그 자리를 보고 있다가 양복 입은 말끔한 아저씨가 누군지 떠올랐다. 동네 여기저기를 항상 말끔한 양복차림으로 돌아다니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손짓까지 해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도 하고 대화도 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가끔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아저씨의 대화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대화의 소재를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맞다. 그 아저씨였다.


 잠을 설치는 바람에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멍하니 정류장에 서 있었다. 저만치서 절뚝거리며 얼굴에 상처투성인 남자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술 취한 남자임을 알았다. 그가 내 뒤에 섰다. 나는 버스 행선지를 확인하는 척하며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옆눈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새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야."

술 취했던 남자에게 다가오는 또래의 남자가 아는 척을 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야, 무슨 일이 었었던 거야?"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을 그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대신 물었다.

"몰라. 일어나 보니 이렇더라고."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 정신이 나가도록 술에 잔뜩 마취된 몸이었기에 그렇게 맞고도 움직일 수 있는 저 정도일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미친 놈. 또 술 진탕 처마시고 시비 붙어서 처맞았구나. 언제 정신 차릴래."

남자들에게는 늘 있을 법한 일이라는 듯 그의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그 둘은 아무렇지 않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출근길 버스에서 새벽에 일어난 일을 신고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호들갑 떠는 미친년이 될 뻔했다. 두어 정거장을 지났을 즈음 버스 창밖으로 오늘 새벽 그 자리에 있었던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아무렇지 않게 혼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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