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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운용 Jul 16. 2021

오랜 친구

바람과 구름과 나


어제 날씨 참 너무 좋아서 행군할 채비를 간단하게 챙겨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하늘 색깔이 쳐다보면 볼수록 시력이 좋아질 듯이 진짜 새파랗다. 팔레트에 방금 짜 놓은 새로 산 물 감색보다 훨씬 더 파랗다.


거기다 구름은 누가 그랬던가 솜사탕 같다고 했는 데, 근데 내가 올려다본 오늘 구름은 상처 입고 슬픈 표정으로 다소곳이 고개 숙인 여인이 새하얀 소복 옷깃을 살 며시 당길 때 치맛단이 날리는 모습처럼 너무 곱고 하 얗다. 손으로 만지고 싶을 정도로 섬세해 그새 바람 타 고 모양이 편할까 각도를 달리해가며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오늘 카메라 초점은 하늘로 맞춘다.


북한산 정상이 보이는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북쪽으로 길게 쭉 뻗은 자전거도로와 보행자도로를 보 노라면 한 번 인연 맺은 구름 따라서 나도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내 달리고 싶다. 블랙 텟트라의 구름과 나. 장남들의 바람과 구름, 내 스무 살 무렵 즐겨 부르던 노래, 오늘 같은 날에 딱이다.

 

많이 정화가 되긴 했는데 상류 쪽에서 정비 공사를 하며 바닥을 파내 하천에 흙탕물이 내려오는 게 오 늘 이 기분 좋은 날 옥에 티다. 그래도 새파란 하늘과 구름과 시력 이 두배나 좋아진 듯 한 탁 트인 시 야 덕분에 어떤 구도로 찍든 훌륭한 배경화면이다.


하천을 거슬러 더 올라가 본다. 오늘은 장면 하나하나가 연출이 따로 필요 없다.


왜가리 한 마리가 물 한가운데에 외다리로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저도 이 좋은 날에 한껏 기분 이 좋은 건지 날개 짓 없이 늘씬하고 단정한 자태를 뽐내며 가만히 걷고 있다.  마치 가까이 오진 말고 멀리서만 바라보세요 새침데기 도도한 여인처럼 경계심으로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워낙 민감한 놈이라 먼거린데도 제대로 된 포즈를 포착 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낮은 포복으로 숨죽여 다가가 보지만 아쉽게도 거리를 좁히는데 또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은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를 계속 열고 다녀야 할 정도로 찍을 거리가 많다.


하천 옆 둑 위에 들꽃들도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 다. 골드 코스모스, 수국, 개망초, 장미, 아네모네, 나팔꽃,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는 길마다 이 좋은 날씨 다들 구경이라도 나온 것처럼 무리 지어 서있다.


시간과 거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다 보니 밥 먹을 때라는 개념을 살짝 놓쳤다. 두 시 반이다. 공인된 점심 식사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겼으니 배가 살짝 고프다. 그새 12km나 걸었으니 이제 국수나 한 그릇 때우자며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로 나왔다.


다리 가운데 서서 잠시 고민했다. 점심을 먹으러 상설 재래시장 쪽으로 갈까 아님 백화점이 있는 먹자 거리 쪽으로 갈까 방향을 정하지 못해서다. 오래 걸어서 이제부턴 집 가까운 쪽으로 가는 게 이동거리도 단축되고 덜 피곤할 것 같아 재래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행선지가 정해졌으니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20여 m 정 도 앞에서 느릿느릿 천천히 걸어가는 두 노인의 뒷모습 이 특이해서 속도를 늦추고 사진부터 찍 었다. 노인들의 뒷모습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팔짱을 낀 다정한 모습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흔히 남자들 더군다나 노인들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건 본 적이 거의 없는 특별한 장면이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노인들께 다가가서 동의 없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으니 양해를 구하고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두 분이 팔 창을 끼시고 걸어가시는 모습이 너무 특별하 고 다정해 보여서 대체 어떤 관계신가 궁금했다" 정중히 물으니,

자신들은 고등학교 동창이고 창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고 오랜 불알친구라 팔짱을 키운 헌팅모를 쓴 노인이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올해 81살. 고등학교 친구니 그 세월이 60년이 너무 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자주 만나 시장도 가고 간단 히 대포도 한잔 하신다며 마주 보며 웃는 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와 다시 걸으면서 이번엔 팔짱을 끼인 노인이 오늘같이 가시거 리가 수백 미터나 되는 화창한 날에 친구랑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인사말을 던지고 창동 지하도로 향해 가셨다.


점심을 떡라면으로 정했기에 여기서부턴 어차피 노인 들과는 갈길이 달라 돌아서다가 이더 위에 꽤 먼 거리를 걸었을 테니 시원한 냉수라도 사드려야겠다 싶어 편의 점에 들어가 최고 작은 생수 두병을 사들고 지하차도 쪽으로 뛰어가 보니 노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인 창 동에 도착했으니 막걸리 한잔씩 더하시려나보다 나도 돌아섰다.


오늘 주제 바꿨다. 바람과 구름과 나에서

오랜 친구들의 뒷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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