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비가 내립니다.
소양강엔 희뿌연 안개가 구름같이 자욱합니다.
비는 어제 밤부터 내렸는데
아직도 그칠줄을 모르네요.
낼 아침까지 온다는데
우산은 꼭 챙겨야겠어요.
못본지 몇일 지나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납니다.
유리창에 뿌옇게 김이 서렸길래
당신의 얼굴을 동그랗게 그려봤습니다.
웃는 얼굴을 그리려 했는데
김서림이 흘러 내려 자꾸만 울고 있네요.
웃는 얼굴을 그리려 했는데
또르르르 눈물을 떨구며 울고 있네요.
우는 얼굴 밑에다
당신의 이름을 써봤습니다.
정희......
비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내일은 그쳤으면 합니다.
1989년 비오는 봄날에.
" 안녕하세요."
" 아! 예. 앉으세요."
건너편 자리로 얌전하게 앉은 그녀는 언제봐도 수수했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고 주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는 듯 했다.
그렇지만 간편하고 캐쥬얼한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맥주를 시키고 나서 기다리는 사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로 환하게 입어도 멋질거 같다 했더니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 전 화려한거 좋아하지 않아요."
차림새와 같이 아무런 수식없이 간단하게 답했다. 사실 화려하게 꾸며도 잘어울린다고 생각해 기분좋으라고 한 말이기도 하고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혀보려는 용식이 준비한 첫번째 작업용 멘트였는데 그녀의 반응은 웃고는 있어도 너무도 차가웠다.
' 이런 눈치없기는 '
준비한 매뉴얼에는 없던 반응이라 용식은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종업원아가씨가 맥주와 마른안주를 가져와 여유가 생겨 그녀에게 환심을 살 다음 멘트를 머리속에 암기해둘 수 있었다. 그녀에게 맥주를 따라주고 나서 용식은 연거푸 맥주잔을 비웠다.
그녀와 단둘이 만나는 첫번째 자리이니 매너상으로도 예의를 지켜아했고 최근 두어달 노동조합일때문에 바쁘게 뛰어 다니느라 피곤이 쌓인탓에 술이 그다지 땡기지는 않았지만 그녀앞이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면 약간의 술로 적셔야했다.
음악다방에서 일할때 손님들한테 막간을 이용해 꽁트나 넌센스퀴즈를 내주고 선물로 커피한잔씩을 서비스했었던 경험을 살려
그녀의 관심을 테이블안으로 끌어모으기로 작심한 용식은
"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아마
들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 꼬박 새워 준비한 건데요.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가볍게 퀴즈문제부터 풀어볼까요.
첫번째 퀴즈
창밖에는 비오고요, 바람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날보고 있네요.
송창식씨의 노래 창밖에는 비오고요란 노래 아시죠?
오늘처럼 비오는 날 분위기 딱 어울리죠. 마침 창밖에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는데 정희씨 우산 안가져왔죠.
요즘 내리는 비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요. 감기를 예방합시다. 문제냅니다.
자! 지금 내리는 비의 온도는 과연 몇 도일까요?
...................중략
두번째 퀴즈
당신과 나사이에 있는 건 무엇일까요?
....................역시 중략
마지막으로 웃기는 얘기 하나만 할께요.
참새 두 마리가 전기줄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포수가 참새들을 향해 총을 빵 쐈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총알에 맞고 떨어지면서 포수를 보고 원망하듯이 그랬대요.
"왜 나만 쏴요? 쟤는 왜 안 쏴요!"
그러자 전깃줄에 앉은 총에 맞지 않은 참새도 포수를 보고
"쟤 아직 안 죽었데요!"
사못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흥미로운 시간을 만들어주려 용식은 애를 썼지만
" 다 아는 것들이예요."
애써 담담한척 여유를 부렸지만 어쩐지 그녀의 반응이 시원치않아 보여 입맛이 개운치않은 용식은 애꿎은 담배만 피워물었다.
담배연기가 뿌옇게 전등위로 춤을 추듯 퍼져 올라가고 침묵이 흘렀다.
너무 늦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식은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그녀의 집부근까지 동행을 했다.
'아. 첫끝발이 개끝발이라지만 오늘 망쳤다. 그렇지만 오늘만 날이냐. 기회는 많다.'
용식은 그녀와의 어설픈 첫만남의 여운을 뒤로하고 발길을 선배의 집으로 천전히 옮겼다
이미 막차를 놓쳤으니 여관은 가긴 싫고 별수없이 막역한 선배의 집으로 가 하룻밤 신세지는 수 밖에 없어 용식은 선배집 가는 길목에 있는 수퍼마켓에 들러 맥주와 과자 과일등을 사서들고는 대문을 두들겼다.
맘씨좋은 선배의 부인이 대문을 열어주며
"용식씨, 아무래도 하숙비 받아야겠어요.
어서 와요. "
" 예. 밤늦게만 찾아오니 하숙비 따블로 드려야죠."
언제나 웃는 얼굴에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만나는 누구든 반겨주는 선배의 부인을 볼때마다 용식은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친누나처럼 편했다.
" 용식씨 저녁 안먹었죠. 들어가 형님이랑
얘기하고 있어요. 안주겸 밥상차려 갈께요."
" 형수님 먹었습니다."
들은체도 안하더니 선배의 부인은 아예 저녁밥상을 차려 들고 들어왔다.
선배의 집에서 식사할때마다 용식은 형수님은 식당을 차려도 부자되실거라며
치켜세울 정도로 음식솜씨가 좋아 따로 술안주를 사올 필요가 없다.
선배부부는 나이도 같고 국민학교 같은 반짝꿍이었는데 대학다닐때 다시 만나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는데 부부라기보다 친구라는 표현이 더 잘어울렸다.
선배부부는 용식이와는 친형제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속얘기까지 주고 받으며 지내왔고 특히나 선배의 부인은 용식씨 색시는 참하고 예쁘장한 아가씨로 자신이 중매 서줄거니까 기다려보라며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형님이나 형수님 참 좋은 분들입니다. "
용식이 사간 맥주가 떨어지고 선배부인은 집에서 담근 거라며 포도술을 한병 꺼내왔다.
집에서 담근 포도술이라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자
" 형수님, 저 연애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헤어졌습니다."
용식은 정희와 만났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사실 선배와 용식 그리고 정희도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어 서로가 잘아는 사이고
작은 읍내라 집안 사정까지도 훤하게 알수 있는 처지라 체면이나 자존심을 따질 필요가 없어 용식은 한잔 한 김에 자랑을 늘어놓았다.
선배는 자신의 친동생 일이나 된 듯이 잘됐다 축하한다면서 맥주좀 더 사와야겠다 일어서 외투를 챙겨입다 돌아서더니 기분도 좋은데 그러지말고 나가서 한잔하자며 용식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 용식씨. 그래요. 형수가 연애상담 확실히 해줄테니까 용식씨가 한잔사요."
" 좋죠. 형님 형수님 오늘 제가 맛있는 걸로 한턱 쏘겠습니다."
용식과 선배부부 세사람은 돈주고도 못배울 특급 연애상담을 주제로 그 밤을 꼬박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