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고민 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무모하게 예의도 없이
그대에게 만나자 했으니
더는 찾지 않겠습니다.
미련없이 다시 돌아 보지도 말자
깨끗하게 손내밀어 악수로 웃음으로
끝내버리자
남자답게 툭툭 털어버리자.
좋아했습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분명 강물이 흐르고 있지만 그대와 나 사이에 인연의 강물도 분명 흐르고 있습니다.
만나야 할 운명인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확신합니다.
어질어 보이는 그대가 그말을 꺼낼때 눈빛에 그늘이 보였습니다.
사려깊은 그대가 굳이 하지않아도 될 말을 할때엔 까닭이 있었을 겁니다.
이제 굳이 말하라 하면
그대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그대를 위해서 어쩔수가 없다면.
내가 돌아서야지요.
5.착한 손수건
깊은 밤 시커먼 바다위로 날렵한 몸매의 새벽달이 홀로 떠있다.
날이 밝으려면 저 달이 수평선 아래로 더 내려가 붉은 기운을 끌어올려야 하니 아직은 더 눈을 붙여도 될것 같은데
용식은 잠이 올 거 같지 않아 머리맡에 있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여관을 들어올때 깨끗했던 재털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방바닥으로 넘쳐날 판이다. 옆에선 우작스런 사내 둘의 무자비한 코골이행진곡이 열창중이다.
지난 한달여, 파업을 결행하자는 결의를 모으기 위해 태백산 줄기를 타고 고단한 몸을 이끌면서 행군을 강행했으며 지난 월요일부터는 동해바다 해안선을 따라 지부를 순회하며 직원들을 만나고 있다.
다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생소하고 두려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용식 역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누군가 해야만 하니 주저하지않고 총대를 맺던 것인데
노동조합활동은 물론 대학을 다니지 않아 학생운동을 해본 경험도 없어 오롯이 정의감하나로 부딪혀가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가 합당한 이유도 없이 부정되고 묵살되는 불합리한 현실을
그냥 모른체하고 있으려니 눈에서 불이 일고 가슴이 답답해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어느날 아침 출근을 해 자리에 앉으려다 책상위에 낯선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가 올려져 있어서 머리 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뜯어보았더니 봉투안에는 다른지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며 보내온 편지글이 들어있었다.
노동조합.
집회 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권리, 단체행동,
열악한 근로조건, 저임금
노동조합을 결성해 쟁취해내자.
책상 아랫쪽 서랍을 열어 선전물이 든 편지 봉투를 집어넣어놓고 용식은 자신이 처한 주변 현실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박봉에다 보험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야하며 매주 실적을 지적당하며 앞으로 불려나가 면박을 당해야했으며 여직원들은 김양 미쓰리 하대를 들어가며 아침부터 커피 심부름에 재털이 비우고 책상 닦으랴 분주했다. 인사규정 어디에도 직무규정 어느 곳에도 그런 일 하라 단 한글자도 적혀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희 그녀 역시 귀찮아하는 기색없이 언제나 가장 먼저 앞서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애처롭게만 보여 다른 직원들이 하게 내버려두지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었는데 권리라는게 누구든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란 점을 깨닫게 되고나서 잘못된 문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 노동조합 간부 일을 선뜻 맡게 되었다.
지부장을 선출하는 날 전 직원이 모여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윤선배가 일어나 제일 먼저 날 추천했고 정희를 비롯한 여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지를해주었다.
빛이 보이지않는 어둠이 끝도 없이 이어진 질곡의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암흑의 시대가 마감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학생운동을 하고 있고 방학때마다 만났던 절친한 친구로부터 5.18민중항쟁의 진실과
군부독재의 만행으로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상세한 얘길 들었고 그때마다 비분강개하며 울분을 터트리곤 했었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며 지배해오던 독재자가
한밤 은밀한 곳에서 측근이란 자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오로지 일인지배체제만이 존재하고 유지해왔던 탓에 정부라는 시스템은 유명무실했고 권력의 핵심에 서 있던 인사들은 우왕좌왕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기위한 비겁한 행위에만 급급해했다.
정부라는 시스템이 부재해 그 빈 틈을 노리고 군부독재정권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으며 자라온 극히 일부의 권력지향적인 군인들이 총칼을 앞세운 불법을 저지르며 때는 이때다 권력을 장악하려하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 거센 항쟁을 일으켰고 전두환을 비롯한 소수의 군인들이 탱크와 헬기로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희생이 되었다.
' 비겁하게도 전두환을 비롯한 학살의 주동자들이 독재에 저항하며 쓰러져간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라 뒤짚어씌우는 뻔뻔함에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고 3때. 라일락 향기가 거리를 뒤덮는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공수부대군인들이 출동해 진압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이 교실안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친구들 틈을 젖히고 들어가 사실이 어떻든 간에 관계없이 민간인들을 향해 총칼을 휘두르는 군바리놈들은 X나게 두둘겨 패버려야한다며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화끈하게 비난했었던 일이 있었다.
군인들을 향해 심한 욕설을 퍼부었던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노름판에서 화투를 치시다 625전쟁이 일어나기전 북한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설명했는데 이를 누군가가 듣고는 밀고해 아버지는 갑자기 보안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한달간이나 고생을 하셨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신 아버지일로 인한 감정도 다분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반항아 기질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고삘이가 계엄령이 내려진 서슬퍼런 시절에 겁도없이 성향을 분출했던 것이다.
학교에 갈때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꼭 파출소앞을 지나치게 되는데 군복을 입은 군인이 긴총을 허리에 받쳐든 위압적인 태도로 노려보며 길가는 민간인들을 향해 위협하고 통제하려해서 군인을 두둘겨 패고 도망을 쳤던 경험도 떠올랐다.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 아침해가 바다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속초지부사무실 방문을 끝마치고 나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이불을 걷어내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여니 파도소리에 박자를 맞춘 해풍이 방안으로 밀려들어와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수평선 너머 깊은 바다아래에 감추고 있던 붉은 해가 웅장한 몸뚱이를 천천히 물위로 솟구쳐오르는 광경은 언제봐도 생동감이 느껴지고 두려운 마음까지 들게했다. 용식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까지 밀려올라와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그때까지도 코골이 행진곡을 연주하며 곤하게 잠에 빠진 동료들을 깨웠다.
" 일출이 기가 막힙니다. 자 다들 일어들 납시다."
속초가 고향인 오무형은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난 매일봅니다 새로울것도 없어요 라며 잠을 계속 이어가고 있고 위원장을 맡고있는 이인구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에 서있는 용식의 곁으로 다가와 탄성을 질렀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속초가 고향인 오무형의 안내로 이북식 조리법으로 특별히 맛있다는 황태해장국집으로 가 전날 과하게 마신 술로 인해 풀리지않은 남겨진 숙취를 풀어내고는 목적지인 속초사무실을 향해 택시를 탔다.
속초는 실향민이 많기도 하고 지리적으로도 북한과 가까워 말투도 북한식 억양이 강하고 사람들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정직하다.
위원장 이인구는 숙취가 덜풀린 다소 쉰목소리로 권리는 스스로 나서 쟁취하는 것이라며 힘을 주어 강조하지만 다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이인구의 목소리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뭔가 필요하다는 인식만은 전달이 된 듯 표정들은 자못 진지해보였다.
흩어지면 죽는다. 하나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구호를 마친 뒤 헤어지는 섭섭함을 달래는 의식으로 동지들과 격하게 악수를 나눈 뒤 버스터미널로 이동한 용식은 한달간의 길고 지루한 여정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고단함이 함께 몰려와 버스에 오르자마자 맨 뒷좌석으로 걸어가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얼른 눈을 감았다.
한 달 전
보름씩이나 사무실을 비우고 지부 순회를 다녀와야 해 점심시간에 직원들을 회의실로 모이게 한 후 약식으로 회의를 가졌었다.
파업을 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도 전달하고 혹시 모를 특별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회의를 마치고나서 용식은 점심식사도 못하고 원주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고 있는데
" 잠깐만요! "
돌아서보니 정희 그녀였다. 아까 회의때 몇번을 마주쳤지만 일부러 시선을 피했었다.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더는 다가가지 않으리라 맘을 먹은터라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그녀는 버스안에서 펴보세요라며 꽃무늬가 곳곳에 새겨진 하얀손수건을
건네주며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잠시 쳐다만 보고 겸연쩍게 웃기만 했을뿐 고맙다는 말한마디 못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조심하세요. "
한계령.
남설악이 시작하는 곳에 위치해 워낙 높은 곳이라 기압이 높아선가 귀가 먹먹해져서 용식은 감았던 눈을 떴다.
버스는 굽이굽이 돌고돌아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고개 한계령 그 꼭대기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오는 날이 흔하다.
가느다란 물방울이 차창에 날라와 또르르르 줄을 지어 맻힌다. 안개비다.
용식은 지부순방을 떠나올때 정희가 준 손수건을 잠바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작은 꽃잎이 수놓은 것처럼 새겨진 손수건을 조심스레 펼치니 만원짜리 두장과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몸 조심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수고하세요.'
까만색 볼펜으로 쓴 그녀의 글씨, 필체가 좋은 건 아니지만 차창에 부딪쳐 강하게 맺히는 안개비방울보다 더 강하게 가슴에 부딪혀 맺혀왔다.
꽃잎 편지.
용식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자신과 그녀와의 사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험하게 굽이치는 협곡을 따라 거치른 강물이 흐르고 있다. 쉽게는 건널수 없기에 아파했고 아쉬운 마음에 돌아설수 밖에 없는 강.
하지만 그녀도 나도 또하나의 강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쩔수 없는 현실앞에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것이기에
그녀가 애써 모른체 하려해도 내게서 흘러간 강물이 그녀에게로 흘러가 여운을 주고 상념에 빠지게 한다는 걸 알기에
가까이 하지만 않을 뿐 떠나 보내지도 못한채 서로 멀리에서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소양강은 그렇게 맻을 수 없지만 잊을수는 없는 인연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윤선배 부인이 나와 그녀를 가깝게 해주려 연애상담도 해주고 일부러 그녀를 자기집으로 불러 내 밥을 같이 먹으며 내이야기도 했다잖은가.
좋은 사람들이다.
" 여자가 그뿐인가. 삼촌 멋있잖아요. 그렇잖아도 정희씨보다 예쁜 아가씨 있는데
소개해주려 하니 잊어버려요. "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리며 상상으로 무한비행을 하는 사이에 버스는 소양강의 넓다란 품을 지나가고 있었다.
집가까이 오게 되면서 춘영이와 친구 명석의 얼굴도 떠올랐다.
춘영이와의 혼담얘기는 어머니를 통해 더는 꺼내지마시라 아버지께 자신의 생각을 전하긴 했으나 자신을 향한 춘영의 은근한 태도를 매몰차게 자르려니 맘이 아팠다.
용식은 정희와의 관계도 있었지만 용식의 친구 명석이가 춘영의 맘을 사려 공을 들이고 있어 용식으로선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었지만
가끔씩 예기치않고 불쑥 나타나 알듯 모를듯한 말 몇마디를 던지는 춘영의 모습에서 묘한 감정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었다.
두어달 전 정희로부터 남자친구얘기를 듣고
명석과 춘영 세사람이 술을 마셨던 그 다음날 입금때문에 농협에 왔다가 들렀다면서
용식의 사무실로 찾아온 춘영은 잠깐 나오라며 용식을 불러내더니 빨간 넥타이를 주고
" 오빠 멀리간다면서요. 잘다녀와요. 이거 꼭 매고."
그리고 한달이 지나 오늘 집으로 가게되는데 넥타이 선물을 받은 답례로
춘영과 명석을 불러내 밥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명석이와 춘영 두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야지'
춘영이도 명석이가 싫지는 않으나 내가 있어 갈등을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난 토요일.
피로도 풀리고 몸도 개운해지자 용식은 업무상 이유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는데 뜻밖으로 정희가 전화를 받았다. 순간 용식은 공무상 이유는 제끼고
" 오늘 토욜인데 퇴근하고 뭐할겁니까? 데이트나 합시다."
"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