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후배녀석의 생일날 한잔술에 심하게 구겨져 일주일동안이나 끊었던 담배를 그때부터 다시 피우고 말았다.
주원료인 쌀이 비싸다고해서 값싼 재료만을 원료로 갈고 삶은 다음 마구 흔들어 적당히 물을 타고 뒤섞어서 만든 소주란 놈은 사실 맛도 없고 인생 전반을 놓고 돌아봐도 백해무익한 나쁜 놈이다.
혀끝이 아리도록 쓰디 쓸 뿐 아니라 몇순배 잔이라도 돌다보면 자동으로 목젖을 열게 만들어 빛과같은 속도로 대뇌에 침투해 논리적 사고의 전개를 방해한다.
좋아하진 않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존재다.
핑계같지만 금연을 향한 나의 굳은 의지와 행동이 술잔속에 담겨 에탄올에
뒤섞이자마자 흔적도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 다시 결심하기 전까지만 피우자. 기왕에 산 담밴데 어쩔수 없지.'
' ...... '
무녀의 도포장삼자락이 무심히 휘날리듯 어지럽게 춤을 추던 담배연기가 차창밖에서 살랑대며 불어오는 바람의 위세에 바람같이 흩어져버렸다.
뜨문뜨문 많지않은 머리카락을 애써 다듬고 공들여 가지런하게 정렬해놓았더니 열려진 차창을 밀고 들어온 바람이 죄 헝클어놓았다. 그래도 얼굴에 닿은 바람의 촉감이 너무 좋았다.
곱디고운 여인의 치맛단에서 사윈다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연식이 꽤 된 사내의 가라앉은 마음마저 무작정 핸들을 잡도록 팔랑거리게 만드는 봄바람이야말로 최고의 고강도 도파민이 아닐수 없다.
'" 경학아. 나다. 뭐하냐."
" 뭐하긴. 봄인데 일한다. 체리나무 심고있다."
몇날이고 함께 밤을 새고 어이없는 현실에 함께 울고 웃던 친구들이 있다. 수십년이 지난 사이지만 일년에 두세번이나 만날까 그 정도로 뜸해 금새 이야기소재가 떨어지고 다소 어색할 만도 하지만, 경학이와 우린 배꼽을 움켜잡고 방바닥을 두들기며 한바탕 웃어제낄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만큼 사연많은 친구들이다.
" 지금 너한테 가고있다. 두시간 후면 도착한다."
" 그래. 조심히 와라. 점심 먹고 봄구경 시켜줄께."
다른때 같았으면 굽이굽이 돌고 돌아도 국도나 지방도로로 차를 몰았을텐데 봄이라 친구도 농사일이며 이래저래 바쁠터라 시간을 절약해야겠기에 오늘만큼은 고속도로로 네비게이숀 경로를 설정했다.
나와 같이 연식은 꽤 오래됬지만 손때묻고 익숙한 애마의 시동을 걸었다.
평일이라 오가는 차들도 적었고 일부러 한적한 옛길을 선택한 덕분에 예정했던 것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학이의 집은 도로변에서도 훤히 보인다. 가파르긴해도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흡사 커다란 병풍이 둘러쳐진 것처럼 보인다.
집앞마당아래로 꽤 큰 개울이 흐르는데 어릴때 친구들과 여름내내 새까맣게 살을 태우며 물놀이를 했었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인기척을 보였는데도 경학이도 그의 아내도 보이질않고 아들딸처 럼 어여삐 여기는 경학이의 귀엽지많은 않은 개들만 짖어대며 난리다.
" 이놈들. 사람이 그립기도 했을거다. 니들 아빠 어디갔냐? "
앞다리를 번쩍들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컹컹 짖어대는 폼이 제법 위협감을 느끼게 하지만 주인을 닮아 사납지않고 다정다감한 놈들임을 익히 알고 있어 두손을 잡아주었더니 다소곳이 고개를 내밀고는 바닥에 착 엎드린다.
" 야 빨리도 왔다. 또 엄청나게 밟았구먼. "
창고에서 나오던 경학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한대 빼물더니 늘 그렇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밈과 동시에 안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여보. 용식이 왔다. 나와봐."
가뜩이나 비가 내릴듯 잔뜩 날은 흐렸고
처마밑 어두운 마루끝에 걸터앉은 경학이의 얼굴빛이 평소보다 더 짙게 보였다.
경학이는 살은 별로 없지만 농사일과 험준한 산을 오르내리는 베테랑 심마니라서 아주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만큼의 살만 있고 노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근육을 가진 건강한 체형의 소유자다.
" 평일이라 별로 안막혀서 빨리 왔다. "
" 여보쇼. 신풍댁! 얼굴 좀 봅시다. "
창호지를 바른 격살무늬의 한옥방문이 열리면서 사람좋은 경학이 처가 마치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며 지내기나 한 듯한 표정으로 나와 반가움의 인삿말을 건넸다.
갑자기 방문해 두사람 괜히 귀찮게 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너스레를 떨며 같이 점심먹으러 가자고 권하자 사람좋은 경학이처는 다른 집 일해주기로 약속했다며 두분이 맛있게 먹고 놀다 오라며 경쾌하게 손을 좌우로 흔든다.
모든 음식을 자신들의 식당 뒷편 밭에서 나는 재료들로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시골 밥상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당앞 나무등걸로 만든 벤취에 앉으며 경학이는 핸폰을 꺼내 산나물과 버섯류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병풍취(?) 이름도 생소한 산나물과 약초들의 사진속에서 험준하고 깊은 산을 오르내렸을 심마니의 연륜과 땀이 흠뻑 베인 흔적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처럼 내려왔으니 공기좋은 숲속으로 봄나들이나 가자며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좌우로 흔들면서 자신의 차가 크기는 작아도 사륜구동이라며 아무리 경사가 심하고 비포장 언덕길이라 해도 한사람만 내려서 밀면 가뿐하게 올라간다는 경학이의 하나도 재미없는 썰렁개그도 오랜만에 들으니 옷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포장이 된 길이지만 차량이 거의없는 산길을 이십여분 지나면서 경학이와 난 수십년전 마의태자의 유적을 발굴하자며 탐사에 나섰던 추억과 오미자농장으로 일하러 다니던 옛날을 떠올리며 경차가 들썩이도록 한껏 웃었다.
비밀의 정원이란 안내표식을 보고 갓길에 차를 세운 경학이는 잠깐 내려가서 보자며
손짓으로 날 불렀다.
" 여기가 상고대가 비경이라서 사진들 찍으려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드는 곳이다. "
철조망너머 멀리 숲속을 가리키면서 가을에 단풍과 어우러지는 상고대가 기가 막힌데 나중에 한번 와보라하더니 문득 오래된 추억이 떠올라 울컥 감회가 밀려왔나보다.
경학이만이 가진 특유의 전설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군사작전구역으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인 경학이가 중학생일때 수백여가구가 살던 산골마을에 사는 학생들은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했다.
그런데 어느날 산골마을에 사는 같은 반 여자친구 가 그만 버스를 놓쳐 무섭고 먼 산길을 혼자 걸어가야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학이가 딴마음이야 있었겠냐만은 오로지 인간미가 발동해 서너명의 남학생으로 구성된 보디가드를 긴급 조직해 밤길에도 불구하고 무사히(?)안전귀가 시켜주었다는 전설을 은근 자랑삼아 풀어놓았다.
지금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지만 경학이의 전설같은 설익은 사랑이 익어가던 옛날일을 상상해보니 흡사 내가 겪은 일이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철조망너머로 늘어진 물버들나무 메마른 가지위로 회색빛 초록빛 새싹들이 봄기운을 받아 앞서거니 뒷서거니 다투며 호기롭게 움트고 있었다.
곳곳에 철조망이 둘러쳐져있고 출입금지 혹은 위험이라 빨간색페인트로 쓴 섬뜩한 경고문구가 적힌 푯말들이 세워진
군사작전구역안에 비밀의 정원, 경학이의 풋사랑 이 여물어가던 철모르던 시절의 추억도 거기 숨겨져 있을텐데 민간인들은 이젠 출입할 수 없다.
망국의 한을 품고 광복의 꿈을 꾸었을 마의태자와 그 유민들의 한이 묻힌 땅.
항병골 입구에 서서 마의태자와 군사들이 광복의 꿈을 안고 전의를 불태웠을 쇠뿔산을 바라보며 전설얘기를 좀더 주고받고 싶었지만 한참 떨어진 곳에서아까부터 군인짚프 한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