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립스틱2-아껴 쓰지 말고 막 써요.

by 김운용


오전 11시

지금쯤은 손님도 없어 바쁘지 않을 거고 어차피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하니 조금 일찍 가서 여유롭게 얼큰한 칼국수나 먹자며 명동칼국수로 갔다.


예상대로 손님은 한 사람도 없는데 어딜 가려는지 사장님이 주방 안이며 카운터를 오가며 여느 때 같지 않게 분주하다.

그러고 보니 옷도 평소와 다른 복장이다.


늘 가슴에 꽃무늬 그림 그려진 분홍색 계열 반팔 티셔츠 같은 것만 입었었는데 오늘은 단정해 보였다.


오늘 입은 옷은 제법 돈을 주고 산 거 같다. 여성 옷은 브랜드가 복잡해 비싼 옷인지 구분이 잘 안 가지만 날씬하다 못해 약간은 왜소한 체형이라 허리가 잘록하게 패인 자켓이 잘 어울렸다.




마룻방 안쪽 구석에 있던 화장품을 담아놓은 분홍색 바구니를 바삐 당기더니 로션 크림으로 빠르게 화장을 하고는 주방으로 가서


콩나물국만 끓여드릴게요. 반찬은 꺼내가실래요.

예.


방금 전 화장하던 흔적이 남은 마룻방으론 올라가지 않고 물병 하고 열무 배추 겉절이를 담아놓은 뚝배기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앉았다.


반찬 옮기기도 좋고 바쁘다는데 콩나물해장국 다 끓었으면 이동 없이 바로 받기에 편리해서였다.

콩나물국이 끓는 동안 적막이 흘러 약간은 어색해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다 끓었을 건데 가스불 끄고 가져다 드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주방 안으로 가

집게로 뚝배기 그릇을 들어 테이블로 옮겨 놓고는 안경에 서린 김 때문에 안 먹고 잠시 기다리는데 건너편 벽에 걸린 거울로 그녀가 보였다.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다 두고 콩나물국 끓이느라 못다 한 화장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원래 뭐든지 먹는 거라면 빠른 속도로 먹어치우는 편인데 콩나물해장국은 너무 뜨거워 평소 습관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적 없었는데 이상하게 너무 어색해서 빨리 먹고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2시까지 아이 학교에 가야 하는데.

빨리 먹을게요.


입천장까지 데이며 서둘러 먹고는 마룻방으로 가 신용카드를 건네다 보니 플라스틱 화장품 바구니 속 립스틱 그것도 분홍색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잘 다녀와요.




한 열흘 정도 지나서 동료들과 다시 명동칼국수엘 갔다. 에누리 없이 주방 옆 마룻방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음식 주문을 했다.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로션병 두 개, 짜서 쓰는 핸드크림 한 개가 있었다. 그런데 립스틱은 보이지 않았다.

돈도 잘 버는 여자의 화장품이 멋 내는 남자들 만큼도 없다. 때 지나가면 하고 싶어도 못할 텐데 너무 안쓰러웠다.


명동칼국수 올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본사가 지방으로 이전합니다.


우리 동료 중 가장 연장자고 넉살이 좋은 최형덕 씨가 앞으로 못 오는 게 아쉽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달 후에 본사가 이전하고 나면 근처 식당들이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상주 인원이 2000명 정도고 대부분 근처 식당을 이용해온 주 고객들이라서 본사 이전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자 근처 식당 업주들도 걱정이라며 푸념들을 했었다.


명동칼국수도 마찬가지다.

마포는 젊은 샐러리맨들이 많아서 그 기호에 맞춘 퓨 전화된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있다.

입맛이 패스트푸드나 서양식에 길들여진 세대들이 칼국수 비빔밥 등 상품이 고전적인 명동칼국수를 베비붐 세대들보다는 아무래도 찾아오는 빈도수가 적을 거다.


몇몇 동료가 그래도 이 집은 사장님 손맛이 좋아 괜찮을 거라며 비위를 맞춰주지만 이미 상인들로부터 주고받은 얘기도 있던 터라 명동칼국수의 주인 그녀는 표정이 없다.


한창 손님이 밀릴 점심때고 예닐곱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그 준비하느라 우리말을 신경 써 들을 수도 없이 바빠서 제대로 못 들었을 거다.




마포

이곳에서 24~5년을 정 들여 살았으니 사연도 사건도 추억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게 사무실 안에서 서류뭉치와 컴퓨터만 뚫어지게 응시하며 보낸 지루한 직장 생활이 아니었다. 인생극장 같은 곡절의 삶을 보낸 이곳을 떠난다 하니 쉬이 늙어버릴 것 같아 아쉽고 서글픈 맘까지도 들었다.


명동칼국수도 호수 형님도 광화문 식당 파이터 형님도 포장마차 2호 집 할머니도

이제 그들과의 사연은 마포를 떠나면서 더는 이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려고 애쓰는 이유가 시간이 가도 추억을 온전하게 남기고 싶어서다.

기억은 늙고 오래되면 흐려져 나중엔 아무것도 되돌려 볼 수 없지만 활자화된 추억은 디지털 보관소에 어떻게든 남게 되니 클릭 몇 번만 하면 그리움 저편 추억 속으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새벽부터 비가 내려 차를 끌고 출근을 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고 선물도 사려면 차로 이동해야 했다.


호수 형님이나 남자들 선물이야 고민할 것도 없이 속옷 세트 몇 장씩 사면 그만인데 여자용이라고 특정해서 선물을 사본 적은 별로 없어 고민스러웠다.

영등포에 있는 ○○○백화점 유명 브랜드 화장품 코너까지 갔다가 가격을 보니 좋은 뜻으로 선물 줬는데 받는 쪽에서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갈등하다 견문만 넓히고 그냥 돌아왔다.


사무실 직원의 자문을 받아 영○○○라는 화장품 전문 매장에 가서 분홍색 립스틱을 세 개나 샀다.


4시 넘으면 문을 닫는다. 포장은 안된다는 매장 직원한테 사정사정해서 겨우 예쁜 선물상자를 만들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청소를 끝내는 중이었다.


어! 안 가셨어요?


오늘까진 마포로 나오는 날.

낼부턴 안옵니다.


섭섭하다. 그죠.


또 보게 되겠죠. 이거 오빠가 주는 선물인데, 받아요.


뭔데요?


그냥 싼 거 샀는데 아끼지 말고 막 써요. 거 돈도 잘 벌면서. 세 개 샀으니까.

갑니다. 잘 있어요.


복도를 걸어 나오다 아쉬워 돌아보니 명동칼국수 하얀 네온사인 등에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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