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스페인, 가슴이 이끄는 곳]
1부 - 말라가 교환학생 이야기
1-15. 스페인, 잠시만 안녕 (No es un adiós, hasta luego.)
*BGM:: Adiós amor - Christian Nodal*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교환학생의 끝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나는 차차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정든 말라가 곳곳과의 작별을 나눌 준비를 해야 했다. 곧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은 온통 아쉽다는 생각뿐이었다. 매일 지나치는 우리 집 앞 거리도, 친구들과 자주 가던 펍도, 심심하면 갔던 말라게따 해변도, 노을이 참 아름다운 히브랄파로도. 그리울 곳들 투성이었다. 드디어 말라가가 내 집처럼 편안해졌는데, 적응을 하자마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가장 먼저 정든 집주인 아주머니네 가족과 미리 인사를 나눴다. 철없고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던 대학생인 나의 생활 패턴이 불편하셨을 수도 있는데도 늘 이해해주시고 배려해주시던 따뜻한 분들. 우리는 집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남는 아주머니의 따스한 말씀. "Mi casa es tu casa. Ya aquí es tu casa en Málaga.(우리 집이 네 집이야. 이제부터 여긴 말라가에 있는 네 집이나 다름없어.)" 내게도 스페인에 가족이 생겼다.
다음으로는 스페인에서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인 든든한 친구들과의 이별을 맞이할 차례였다. 체코에서 온 로만은 기타 연주가 취미인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농담으로 "나 한국 가기 전에 기타 한 번 쳐줘."라고 건넸는데 그는 이를 잊지 않고 약속을 지켜 주었다. 우리는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말라게따 해변에 빙 둘러앉아 로만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그날따라 더욱 아름다웠던 석양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석양 중 가장 기억, 아니 가슴에 남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이 너무나도 벅차게 행복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미루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페인에 오기 전, 친한 친구들이 생기면 어떤 한국적인 선물을 주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천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준비해서 거기에 짧은 편지를 써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준비해 온 지폐가 부족할 정도로 나는 좋은 친구들을 정말 많이 사귀었다. 한 명씩 인사를 나누며 준비한 쪽지를 건넬 때마다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적어도 비행기로 몇 시간이면 오가며 만날 수 있는 유럽에서 살지만, 나는 다시 스페인에 오려면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머나먼 한국 땅으로 돌아가기에 다음 만남이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서글프게 만들었다.
이곳에서의 추억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말라가 대학교에서 받은 흰 티셔츠 위에 그동안 정든 사람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향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소중하고 고마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말은 프랑스 친구 킬리안의 "We are always here."이었다. 이 말이 언제든지 내가 스페인에 돌아와도 나를 기억하고 반겨주는 따스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렇게 드디어 찾아온 말라가에서의 마지막 날 밤. 나는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우리의 아지트나 다름없던 펍에 가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친해진 바텐더와 펍 오너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내게 넌 다시 오게 될 거야. 보여.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한 마디. "Hasta luego. No adiós. (다음에 보자. 영원한 안녕이 아닌.)" 그 말이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는 살던 방을 마저 정리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벨기에 친구 파트마는 나를 돕겠다며 함께 와주었다. 내가 너무 고맙다고 말하니 돌아오는 그녀의 감동적인 멘트. "친구끼리는 고맙다고 하는 거 아니야."
짐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말라가 중심가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피카소 동상이 있는 메르셋 광장. 피카소 동상 앞에서 나는 소원을 빌었다. "저 꼭 다시 오게 해 주세요, 말라가에. 스페인에."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리오스 거리를 지나쳐 말라게따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는 잔디 위에 누워 고요한 밤바다를 한 번, 별로 가득 찬 밤하늘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며 쉼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실없는 농담부터 진지한 인생 이야기까지. 그렇게 실컷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바다 저편에서 일출이 시작되었다. 파트마는 내게 바다에서 보는 첫 일출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날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는 파트마와 공항으로 향했다. 나의 베스트 프랜드였던 한나, 니다, 해리엇도 함께 배웅을 나와 주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나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공항에 작별 인사를 하러 와주는 친구들을 만든 나 자신도 대견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마음 따뜻하고 좋은 친구들이 내 삶의 한 페이지에 나타나 주어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온보딩을 하기 전까지 내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별은 언제나 슬프지만 이날의 이별은 조금 더 가슴이 아팠다. 원하지 않은 작별이어서였을까.
2019년 2월 25일. 이렇게 나는 말라가 교환학생의 막을 내렸다.
도착한 인천 국제공항.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국이 반갑지 않았다.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수많은 유럽 국가들을 여행했지만, 늘 말라가 공항에 돌아와서 스페인어를 듣는 순간이 가장 마음 편안하고 행복했던 나였다. 왜 스페인 내륙에서 더 많은 곳을 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어를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등. 아쉬운 것들 투성이었다. 내 넘치는 스페인에 대한 사랑은 6개월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지금 있고 싶고, 있어야 할 곳은 스페인이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절대 잊지 말자. 지금 이 감정, 내가 스페인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그리고 반드시 돌아가자. 스페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