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그런 유행어가 있었다. '엄마 친구 아들'. 항상 엄마 친구 아들과 딸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가서, 대기업에 입사해, 첫 월급으로 명품을 사주는, 그런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생판 모르는 엄마 친구의 자녀를 미워하게 된다는 밈이었다. 행복은 자신에게 있잖아요. love your self. 이런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게 가까운 주변인과 비교를 당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러운 행위였고, 행복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가진 사회에서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아빠 친구 딸'이자 소꿉친구에게 셀프 비교를 했다. 8살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관계인데, 당시 일용직이었던 아빠의 고등학교 동창인 아저씨는 은행장이었고, 아줌마는 지역 유지인 할아버지에게 사업을 물려받았다. 자연스레 소득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나와 친구는 어리다 보니 그런 경제사정을 모른 채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초등 2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둘 다 바이올린을 배웠다. 악기라는 게 참, 조금만 신체가 자라도, 조금만 뒤틀려도 교체해야 했다.(심지어 난 왼손잡이라 더 비싸게 구매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올라갈 때, 나는 바이올린을 그만뒀다. 초보자용을 졸업한 내가 구매해야 하는 바이올린의 가격은 약 2천만 원. 취미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내 친구는 덜컥 바이올린을 구매 후 대학 때까지 바이올린을 켰다.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큰 획으로 보자면 나는 집안에 돈이 없어 특성화고에 입학해 바로 취업을 하는 쪽으로 선택했고 (그렇지만 전문대를 들어가 졸업 후 취업을 했다.) 친구는 인문계 - 인서울 - 대학원 - 연구원 루트를 탔다. 지방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서울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님을 처음 알게 된 계기였다. 정말로 친한 친구라면 이러한 이해관계없이도 잘 지낼 수 있겠지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진 마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좋은 관계는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고는 하나, 내 마음을 친구가 알면 경멸할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첫 질투이자 비교 대상이었던 친구였지만 나름 얻는 것도 있었다. '어차피 내가 못 가질 텐데 굳이 비교하며 불행해지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남과 비교하고, 나보다 좋으면 깎아내리고 흉보는 것이 잦다. 단순히 나 보다 돈을 잘 벌어도, 나는 뚜벅이지만 남은 차를 사도, 하물며 좋은 반려를 만나는 것조차 질투한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현실이 된 것 같다. 물론 이런 숨쉬 듯 한 질투로 인해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며 자존감을 깎아내린다. 최대한 그렇지 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이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결국 행복해 보인다는 것은 남이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 자신이 행복한 거면 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질투 역시 나의 '행복'의 요소 중 하나를 남이 갖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본다. 나도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좋은 차를 사고 싶고, 괜찮은 반려를 맞이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남이 미운 것이다. 나를 조금 더 불행하게 만드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은 남, 나는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라는 패배주의적 사고를 가지라는 건 아니다. 결국 나와 남의 상황을 분리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어떠한 노력으로 저런 결과가 나왔을지, 또는 그런 결과를 얻기까지의 남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일반화시키면 안 된다. 흔히 질투는 추하다고 한다. 과연 해보니 비참한 것은 본인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를 정말로 아낀다면 불행밖에 남지 않는 비교하기보다 나를 발전시키는 무언가를 하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