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힘들다고 말하면 되잖아

신혼일기 첫번째 : 일곱 번째 직장에서 적응하기

by FAYESONA

스무 살이 되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그래서 나는 성년이 되기만을 수도 없이 바랬다. 그러나 세상은 인터넷 속이나 내 주변의 어른들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가늠해 낼 수 있는 단순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인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이 아주 어렵고, 복잡하고, 고민스럽기가 그지없다.



모두의 통장에 달마다 찍혀대는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100만원이 넘게 돈을 벌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친구들은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3만원 씩을 어렵지 않게 용돈으로 출금할 수 있었는데, 당시 서울로 쫓겨오다시피 한 나는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잠든 엄마의 지갑에서 몰래 만원 씩을 빼내곤 했다. 이것이 장발장의 시작인가 하는 상상을 곁들이며.


하지만 그냥 사실 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그 돈으로 고작해야 친구와 주말의 카페에 가거나, 가끔 매점에서 간식 사 먹기, 가끔 학용품 사기, 그런 것들을 할 뿐이었다. 학교에 내야 하는 돈도 최대한 감면받고 있는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필요한 돈들을 오천 원씩, 만원씩 말없이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엄마도 알고 있었고, 엄마가 안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갑의 돈이 항상 일정하게 차 있을 수도 없을 테니.


그렇게 비행이라 하기엔 그렇고 철이 없었다기에도 좀 짠했던 지지리 궁상의 고등학생은 이제 100만원 단위의 돈을 스스로 벌 수 있는 대학생이 되었다, 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의 순간이 기억난다. 이 돈은 무슨 돈인가. 이 돈은 정말로 나의 돈인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내가 버는 돈은 사실 모두 남의 돈이다.


남이 버는 돈 역시 모두 또 다른 남들의 돈이다. 하나의 커다란 재화로 가득 찬 구름에서 서로의 파이를 나눠먹는 거다. 순간순간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재화로 바꾸고, 충당하고, 그게 조금 넉넉하면 풍요롭고 없으면 배고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이 아주 단순한 순환구조처럼 여겨지기도 할 테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가 없다. 고작 그 흘러가는 모든 행위들 사이에 모든 인간사의 불행과 슬픔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예술도 탄생했을 거다. 그렇게 소용돌이 속에 살다 보면 행복은 어쩌다 운처럼 튀어 오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말 그대로 운이니까.


나는 예술인활동증명을 가지고 있는 예술인이지만 4대 보험을 넣은 햇수도 7년이나 넘었고 지금은 막 공무원 연금을 넣기 시작했다. 가지가 여러 개 뻗친 인간이다. 직업의 스펙트럼이 아주 대단하다. 내 삶을 포장하는 말이라기보다 이쯤 되니 그냥 그런 것 같다. 뭐든 쌓이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매번 전학을 다니는 초등학생의 심정이 느껴진달까, 다채로운 삶이란 게 사실은 꽤나 골치가 아프다.


직장으로 따지자면 지금 들어온 조직이 딱 일곱 번째다. 그전까진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마이크 앞의 성우가 되기도 하고, 카메라 앞의 리포터가 되기도 했다. 글도 썼다. 바로 작년까지도 그랬다. 그렇게 여섯 번의 이직과 혈혈단신의 부업을 정신없이 병행하던 사이, 정확히 이 글을 쓰기 두 시간 전 즈음, 나는 목놓아 울었다.


새로운 적응의 몸살을 앓느라 시작된 루틴 때문이었다. 이번의 희생양은 신혼 2년 차의 남편이다. 우선 나의 루틴이란 것은 이렇다.



1. 새로운 조직에 들어감

2.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나의 개성을 죽이기 시작

3. 모두가 나를 좋아할 때까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부담을 참기 시작

4. 그러다 트리거 하나 건드려짐 (ex: 무시당하거나 남의 일을 떠맡게 될 때)

5. N년차의 트라우마가 작동하며 감정이 극단적으로 변하기 시작

6. 이직을 하고 싶다 or 저 사람과 싸우고 싶다 사이에서 번민하며 또 참기 시작

7. 스트레스의 모든 원인을 내 경제적 부자유에서 찾기 시작

8. 화살이 가족에게 돌아가며 툴툴대기 시작하고 우울의 늪에 빠지기 시작

9-1. 결국 참지 못하고 조직 내부에서 한번 크게 부딪히기

9-2. 조직 내부에서 좋은 사람들과 친해져 나만의 요령을 찾기 시작

10. 이것을 계기로 빠른 적응이 시작되며 의외로 모두와 친해지며 원만해짐

11. 현재 조직에서의 한계를 느끼며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미련 없이 퇴사 결심

12. 그리고 들어간 새로운 조직에서 1~11 반복



아주 인격파탄자가 따로 없다. 어우 그냥 쓰면서 한숨이 3번 정도 나왔다.


예상하겠지만 지금은 8번의 과정에 머물러있고 남편에게 말도 안 되는 유치한 꼬투리를 잡으며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등의 결투를 신청하다 대뜸 목놓아 울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울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들을 2시간 이후 이곳에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어이없게도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진작에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되었을 것을.

내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그냥 힘들다고 말하면 되잖아


내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너무도 어렵다


먼저 마음속으로는 내가 나를 다스리고 주체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태가 스스로 너무도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걸 내가 괜히 화살로 쏘아대고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면 되는 거였다. 한차례 냉전의 시간 끝에 남편이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대뜸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났다.


"우리 화해하자."


유치하게 내뱉은 말에 남편은 으이구, 하며 그런다.


"안 싸웠어 우리."


그래서 나도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나 힘들어."

"응, 많이 힘들지.."


그러니까 갑자기 마음속에 있던 문장들이 선명하게 이어진다.


"나를 잘 다스리고 싶은데 그게 안 돼."

"...."


한번 말하고 나니 이제 막 문 열린 만원 지하철의 직장인들처럼 문장이 숨도 쉴 새가 없이 튀어나온다.


"나를 잘 다스리고 싶고 내 감정을 잘 조절해보고 싶고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주말 아침을 날리고 싶지 않고 이렇게 오빠를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은데 마음처럼 안 돼. 그게 너무 화가 나. 그걸 말하지 않고 오빠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말이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나한테 또 화가 나. 더 이상 어릴 때처럼 손해 보고 살고 싶지도 않고 지고 싶지도 않고 바보취급받고 싶지도 않은데 그런 생각만 하는 내가 화가 나. 나 내가 힘들어. 내가 진짜 너무 힘들어."


그렇게 마음에 있는 말을 쏟아내니 울컥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소리 내며 엉엉. 오열이 시작된다. 남편은 항상 듣던 투정이겠거니, 하는 표정에서 어느덧 짐짓 놀란 듯 가만히 멈추고 말이 없었다. 안고 있는 상태 그대로 토닥토닥만.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니 점점 무언가 응어리가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시원했다. 과거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를 이해하지 못하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웃겼다. 웃긴다. 그리고 아, 시원하다. 이것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너무 시원해.."


그리고 또 엉엉 울었다. 남편은 웃으며 토닥토닥, 그러나 속상한 듯 한숨도 쉬었다. 나는 그 속에서 안락한 마음과 해방의 마음을 한가득 느낀다. 가족에게 위로받았다. 나는 내 편이 있다. 스스로에게도 조금 이긴 기분이었다. 이대로 출근을 한다면 똑같은 상황도 조금 더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런 건가.


이제 다음 단계는 직장에서 조금씩 힘든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것일 거다.


어쩌면 무조건적인 나만의 루틴에 갇혀 내가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악화될 수 있는 순간을 조금씩 이야기하며 무마시킬 수도 있을 테다. 여전히 새로운 환경은 나에겐 어렵지만, 뭐든 쌓이면 대단해지는 법이다.


이 글은 사실 신혼일기 카테고리의 첫 글이다. 인생에서 절대 없을 것만 같던 '결혼'이란 것에 대해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결혼은 해야 할 필요도 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없다.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작정이다. 이 혐오의 시대 속에서.


그전에... 이렇게 나의 루틴처럼 마음속의 응어리로 자리 잡은 상처나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함께 힘힘내보자.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 이 브런치 속에 글을 주절거리고 있는 1인도 잘 살아내고 있다.


일단 오늘은, 맛있는 하이볼 한 잔과 함께 복수 드라마 한 편 때리면서 맘 놓고 해방하기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세이 작가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