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A (1)
언제든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다. 클릭 몇 번으로, 터치 몇 번으로 생전 얼굴도 몰랐던 사람의 취향과 습관과 생각을 알게 된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상태로도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알게 된 소중한 사람들이 많기에, 이 손쉬운 연결의 순기능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하다. 너무 쉬운 것들이 주는 허탈감. 그런 감정을 느낄수록 생각나는 누군가가 있다. 우연히 만나 찰나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연락이 끊겨버린 A가.
우리는 쿠바 아바나의 작은 식당에서 만났다. 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나는 돈을 아끼려고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식당에 들어갔다.
쿠바는 두 가지 화폐를 쓴다. 외국인용 쿡(cuc)과 내국인용 쿱(cup). 1쿡이 25쿱이었고 외국인 대상의 식당은 음식 하나에 보통 6쿡 정도, 현지인 식당은 30쿱 정도 했으니 현지인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대여섯 배 정도 되는 돈을 아낄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조그만 브라운관 티비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밥과 닭고기가 올라간 음식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쿠바 사람이었다. 스페인어 억양이 남아있는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여행 중이야? 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이 근처에 내 갤러리가 있어. 시간 괜찮으면 놀러 와.”
쿠바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배로 인해 공용어는 스페인어고 냉전 당시 미국과 단교 후 공산권 국가와 중남미 국가들과 주로 교류했기 때문이다. 2015년에 미국과 재수교를 맺기 전까지 학교에는 영어 교육 과정이 없었다.
영어로 말을 거는 이들 중 대다수는 여행객에게 사기를 치거나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래서 경계했다. 캣 콜링에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A의 갤러리에 갔다. 보통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잘 세우지 않아 심심하기도 했고 미술사를 공부한 나로서는 그림을 그린다는 그 애가 좀 궁금했다. 사람 운이 좋은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 식당으로부터 몇 블록을 지나면 바로 그 갤러리였다. 문 앞을 기웃거리다 그 애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A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곤 갤러리를 안내해줬다.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만 갤러리였다. 나름 다락도 있어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A는 갤러리 곳곳에 있는 자기 작품들을 내게 보여줬다.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오비스포 거리에서 파는 기념품용 그림과는 달랐다. 눈을 사로잡는 원색이나 클래식 카, 춤추는 남녀, 쿠바 국기나 체 게바라 대신 이집트 벽화가 생각나던 평면적인 그림, 깨진 거울에 비친 것 같이 파편화된 발레리나, 커다란 천 위에 몸을 웅크린 댄서가 있었다. 개중엔 꼴라주도 있었다. 책이나 신문지를 붙였는지 알파벳도 보였다.
“이건 무슨 뜻이야? 의미가 있는 글자들이야?”
“사람들은 글자를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읽잖아. 의미를 유추하기도 하고. 이건 신문지를 꼴라주한 건데, 사람들의 눈길을 좀더 붙잡고 싶었거든. 의도적으로 배열한 단어일까, 아니면 별 의미없이 꼴라주하기만 한 걸까 생각하며 그림 앞에 좀더 머물길 바랐어.”
내가 그 글자들의 의미를 물어본 것만 봐도 A의 의도는 성공했다. 정작 답은 못 들었지만. 사실 죄다 스페인어인 그 글자들은 내게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다가올까. 단어의 뜻과 그림을 연결시킬까, 아니면 나처럼 그림의 일부로 특별한 의미 없이 다가올까. 궁금했지만 내 짧은 스페인어로는 이 생각을 다 전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제 뭐 할거야? 계획 있어?”
“어.. 노을이나 보러 가려고. 건너편에 요새가 유명하던데.”
“요새 근처에 더 좋은 곳이 있어. 가자.”
A는 내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어릴 때 자주 가곤 하던, 해가 지는 것을 보기 좋은 곳이라면서. 현지인의 추천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은 나는 주저 없이 A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