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D (1)
*제목은 오지은서영호의 ‘허전해져요’ 가사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4월의 제주엔 고사리 장마가 내린다. 그 기간 동안 내리는 비를 맞고 고사리가 잘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백, 벚꽃, 겹벚꽃, 유채, 귤꽃, 수국. 4월은 계절의 변화를 피는 꽃으로 알 수 있는 제주의 봄여름 중 가장 흐리고 쳐지는 시기였다. 서귀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탭으로 일했던 나는 어디 멀리 나가기도 번거롭고 손님도 많지 않은 눅눅했던 시기를 어떻게든 잘 말려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날은 비가 쏟아지다 못해 퍼부었다. 우산을 들고 있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장을 보러 시내에 나갔던 우리는 차 유리를 깨부술 것 같은 굉음에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섞인 헛웃음을 내뱉었다. 차에서 내려 강물처럼 흐르는 비가 고인 땅을 찰박이며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쫄딱 젖기엔 충분했다. 그날은 내가 일하는 날이었서 얼른 씻고 나와 게스트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잠깐 비가 잦았을 그때에, D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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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 탓인지 게스트는 D를 포함해 두세 팀 정도가 다였다. 여전히 비가 많이 오고 있었고 밖에 나가 저녁을 먹기엔 번거로운 날씨였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는지 라운지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게스트가 올 때마다 으레 하는 질문들을 똑같이 물어봤다. 제주에는 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딜 다녀왔는지, 언제 왔고 얼마나 있다 가는지 등등. D는 밀리고 밀린 휴가를 쓰려고 제주에 왔다. 해외도 있는데 왜 제주에 왔냐고 물어봤다. D는 “해외는 자주 나갔었는데 제주도는 아직까지 와본 적이 없었거든요.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D가 생애 처음으로 제주에 도착한 날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고 D가 제주에 머물 날들의 대부분은 비가 오거나 흐릴 예정이었다. 매니저 언니는 모처럼 온 휴가, 여행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을 게스트들을 데리고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비에 젖어 연무 낀 숲, 으슬으슬한 날씨에 몸이 사르르 녹는 보말 칼국수 집, 비 올 때만 볼 수 있는 폭포. 잠깐 해가 뜨면 내린 비로 더 짙어진 검푸른 서귀포 바다를 보러 갔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을 땐 라운지에 스크린을 띄워놓고 영화를 봤다. 금세 조용해지는 제주의 저녁엔 우린 밤마다 막걸리와 안주를 먹으며 끝 모르게 수다를 떨었다. D는 조금씩 바뀌는 며칠 간의 게스트 중 가장 오래 묵은 장기 숙박객 자리를 차지했다.
D는 프리다이빙을 좋아한다고 했다. 해외에 나갔던 것도 모두 프리다이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얘기가 나오자 같이 일했던 다른 스텝은 제주가 얼마나 수영하기 좋은지 이야기했고 우리 모두 여름에 꼭 다시 오라고 D를 꼬셨다. 마음이 정말 동했는지 D는 떠나는 날 조만간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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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되었고 나는 틈만 나면 바다로 수영을 하러 갔다. 날이 더우면 다 같이 얼른 청소를 끝내고 작은 포구에 수영을 갔다. 손끝이 저리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물속에 있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에야 밖에 나와서 달궈진 바닥에 누워 몸을 데웠던 게 그때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D는 정말 다시 돌아왔다.
D는 작은 마티즈에 짐과 다이빙 장비들을 싣고 도착했다. 우리가 가는 수영 스팟은 장비를 써야 할 정도로 깊은 곳은 없어서 쓸 일은 별로 없었지만 D는 가볍게 웃으며 상관없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 이미 다이빙을 하고 왔고 여기서 보냈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다시 온 거라면서.
D가 도착한 지 며칠간은 날이 좋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D는 그동안 다이빙을 하며 알게 된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줬다.
“서귀포처럼 바위가 많은 바다에 가면 물속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있어. 불에 무언가 타는 소리 같기도, 깡통 속에서 자갈이 굴러다니는 소리 같기도 한데, 그게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야.”
“날이 좋은 날에 깊이 잠수하면 물속에 내리는 빛이 마치 장막처럼 보여. 구름 사이로 내리는 빛처럼 말이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바닷속에서 내리는 빛을 보고 있으면 신을 믿지 않는데도 경외감이 느껴진다니까.”
“잠수했을 때의 고요와 평온에 익숙해지면 가끔은 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져. 유명한 다이버들 중엔 정말 물 밖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어.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해.”
나는 D처럼 깊은 곳을, 오랜 시간을 바닷속에 머물 순 없었지만 그 애의 말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바다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은 D가 말해준 비밀들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