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D (2)
제목은 오지은서영호의 ‘허전해져요’의 가사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D는 날씨 운이 없는지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흐린 날이 이어졌다. 이미 저번에 비가 오면 가는 곳들을 대부분 갔던 터라 D는 주로 라운지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D의 플레이 리스트를 같이 들으며 일기나 글을 썼다. 작게 들리는 빗소리와 음악 속에서 느슨하고 조금은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던 중에 D가 내게 물었다.
“수영하러 갈래?”
“지금 비 오는데?”
“비 오는 날 수영이 얼마나 멋진데. 옷이랑 수건만 좀 넉넉히 챙겨가면 돼.”
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였지만 D의 말을 듣고 후회한 적은 별로 없으므로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갔다.
비가 오고 있어서 바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옷이 젖었다. 바다 속이나 밖이나 다를 게 없었다. D는 그게 좋다고 했다.
“우산을 써도 젖어버리는 옷이 찝찝해서 비 맞는 걸 싫어하는데 이때만큼은 좋아져. 어차피 젖을 옷이니 안 젖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잖아. 자유롭고, 거리낄 게 없어진 것 같아서 좋아. 물속에 있을 때처럼.”
물은 차가웠지만 이전에 수십 번이고 경험했던 것처럼 몸이 금방 그 온도에 적응할 것을 알았다. 비에 이미 젖어 있어서 더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잠수를 하기 전 얼굴만 동동 뜬 채로 D는 내게 당부했다. 비가 오는 날은 파도가 세차니까 꼭 조심해야 한다고, 너무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 꼭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어느 정도 잠수하고 나면 꼭 수면을 바라봐.”
5미터쯤 되는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기압 때문에 귀가 멍해지면 이퀄라이징을 하며 내려갔다. 바닥과 수면 중간쯤 왔을 때 D의 말대로 수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기엔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있었다.
수면을 때리는 빗방울들은 크고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반짝반짝했다. 빛이 없는데도 빛이 났다. 끊임없이 빛나는 수만 개의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빛이 내리는 수면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숨이 막혔다. 팔을 휘저어 몸이 뜨지 못하게 한 채로, 견딜 수 있는 숨의 한계치까지 참아낸 채로 그렇게 물속에 있었다.
숨을 뱉어내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D는 내 표정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미 알아챈 듯이 웃어 보였다.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던 D는 파랗다 못해 보라색이 된 내 입술을 보고 물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떨어진 체온과 내리는 비에 젖은 옷은 마를 틈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추웠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제주에 머무는 세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그날을 가장 오래도록 기억할 것을 알았다. 아니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날들에도 이때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
D가 떠나는 날도 비가 왔다. D에게 처음 방을 안내했을 때처럼 그날도 내가 당번이었다. 아침을 차리고 같이 밥을 먹은 뒤에 D를 배웅했다. D는 여기서의 처음과 끝은 나와 함께한다며 웃었다.
“재밌었어.”
“나도. 네가 알려준 것들, 모두 고마워.”
“세상엔 그보다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넌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으니까 그런 것들로 네 삶을 채워나갔으면 좋겠어. 눈을 크게 뜨고, 지나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제주에서의 시간을 그토록 선명히 기억하는 건 D의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던 시기. 나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내 살갗을 스쳐가는 시간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젠 시간이 꽤 흘렀고 그때만큼 안간힘을 쓰며 순간을 살려고 하진 않는다. 모든 순간에 진심이기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여전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있지만 나는 그게 새롭고 기대되기보단 지루한 반복일 거라 짐작한다. 기대라는 것은 언제나 실망을 가져온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가 올 때,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반짝이는 별을 볼 때 가끔은 D와 함께 했던 날을 떠올린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살 수밖에 없는 지금 그런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생각한다. 시간의 풍화에 바래지는 수많은 것들 중에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없어도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 것 같다.
달을 보며 하는
수영이 어떤 것인지
난 몰랐어
하늘을 오래 보면
별들이 많아지는 것
몰랐어요
그런 것 전부
당신께
배웠으니까
허전해져요
오지은서영호, 허전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