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F
*이미지 출처는 다음 영화 원더풀 라이프
영화를 봤어. 원더풀 라이프라는 일본 영화. 사후 세계에 대한 영화인데 정확히 말하면 연옥 같은, 천국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야. 그곳에는 일주일마다 영혼이 도착해. 우리가 사는 현실처럼 월요일부터 일요일, 일주일을 단위로 모든 게 움직이고 직원들도 존재해. 죽어서까지도 일을 한다니, 좀 끔찍하지 않니.
아무튼 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일해. 영혼들은 도착하고 삼사일 내로 선택을 해야 하거든. 천국이라 불리는 곳에서 영원히, 유일하게 보게 될 인생의 단 한 가지 기억을. 직원들은 영혼들이 그 기억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 삶의 기억들이 담긴 테이프를 제공해주고 선택을 돕기 위해 대화도 해. 그들이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면 뭐랄까 실적에도 안 좋은 영향이 가는 것 같았어. 상사는 월요일이면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며 사기를 북돋고 직원들은 기억 선택에 영 관심이 없는 영혼들을 맡았다며 하소연도 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
기억을 선택하면 직원들은 최대한 많은 레퍼런스와 현장 조사를 통해 가장 비슷하게 그 기억을 재현하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 마지막인 일요일엔 상영회를 하고, 상영이 끝나면 영혼들은 사라져. 그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천국으로 간 거지. 그럼 직원들은 어디에서 온 거냐고? 그들은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어떤 이유로든, 삶의 어느 한 순간도 고르지 못한 사람들.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만들어내지. 내가 본 영화도 그렇고, 이미 인간의 업보와 사슬이 너무도 깊고 촘촘히 연결되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란 드라마도 있고, 각국의 수많은 종교만 보아도 그렇잖아. 그 누구도 진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일까. 사후세계에 대해서라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론과 증언과 이야기가 넘쳐나는 걸 보면 말이야.
F, 우리는 자주 죽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지. 사는 게 귀찮아. 버거워. 빨리 죽고 싶어. 그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면서. 내가 너보다 빨리 죽을걸. 아니 내가 먼저 죽을 건데. 하면서 유치하게 우겼었잖아. 근데 진심은 아니었어. 삶에 대한 의지는 바닥이어도 너와 이야기 나누는 게 나의 가장 큰 유희였으니까. 이겨도 지는 게임을 바득바득 이기려 애를 썼던 건 너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겨지기 싫었기 때문이야. 영화 속 시토리가 타카시와 연옥에서 함께 있기 위해, 그와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끝끝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린 그렇게도 자주 죽음을 이야길 했는데 정작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해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네. 너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보나마나 천국을 믿는다고 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리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니,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길 나눴다면 재밌었을 텐데.
나는 죽으면 모든 게 끝이 나길 바라. 퓨즈가 끊기듯 팍-하고 모든 게 깜깜해지는. 그런 결말을 늘 꿈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처럼. 사실 해탈의 경지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참 쉽게도 그걸 바라고 있네.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잖아. 버겁고, 지겹고, 견디지 못할 날들이 행복한 날들보다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니까. 이건 나의 몇 번째 생일까. 해탈까지 몇 번의 삶이 남았을까.
네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 너는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할까. 아니면 나처럼 모든 게 끝이길 바랄까. 너도 나만큼이나 인간사에 회의적인 사람이었잖아. 천국이라고 해도 영혼이든 천사든 사람 비슷한 게 있을 테고, 그렇다면 분명 갈등 같은 것도 있겠지. 내가 본 영화처럼 말이야. 아니면 최소한 끝없는 영원이 주는 무료함이라던가. 아무리 행복한 기억이라고 해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그걸 정말 천국이라 부를 수 있어?
끝이 있다는 건 저주이자 행복이니까, 동전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내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없잖아.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처럼 둘 모두 감내해야 할 것인 걸.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 선택의 갈등도, 선택 후의 책임도, 괴로움 끝에 만나게 될 달콤함도, 결국 끝날 행복과 어김없이 찾아올 지루한, 어쩌면 고통일 날들도. 그것이 내가 바라는 죽음이야. 천국이 우리가 바라는 모든 형태의 사후세계를 말한다면, 나는 그런 천국을 꿈꿔.
그렇지만 죽은 뒤에 영화처럼 그런 세계가 펼쳐진다면 말이야. F, 너라면 어떤 기억을 고를 거야? 길지 않은 이 생에 네가 영원히 안고 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이야?
그 대답이 날 속상하게 만들 것이란 걸 알아. 내가 없는 기억을 선택해서 기어코 날 울게 만들 것이란 걸 알아.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너와의 기억을 고를 테니까.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져서 진심으로 그게 내 착각이 아니길 빌었던 그 밤을.
F, 너는 나보다 오래 살 거야. 너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꼭 낳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려면 오래 살아야지. 오래 살 수밖에 없지. 나는 그런 미래엔 별로 흥미가 없으니 아마도. 그렇게 우겼던 유치한 장난이 정말로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어. 이제 더는 너와 그런 장난을 칠 수조차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