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든다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라고

몇 번의 파도가 지나면 알게 되겠죠

by 연Yeon

서영님에게


오늘의 날씨는 흐린 것 같지만 더워요. 하늘빛에 속아 긴바지와 긴팔을 입었는데 약간 땀이 나는 정도의 온도예요. 밤은 여전히 춥기 때문에, 또 저는 추위에는 아주 약해지기 때문에 뽀글뽀글한 외투를 챙기려고 했지만 잊어버렸어요. 지하철역 앞의 도로 한가운데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어요.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인도의 끄트머리에 서서 신호가 바뀌자마자 횡단보도 옆의 차도를 건너 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평소 타는 방향에 열차가 도착했고 잠시 멈칫한 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요.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활자로 적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 지가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이동을 할 땐 늘 무언갈 하고 있어요. 춤 수업 때 틀을 음악을 듣는다든가, 일을 하고 있거나, SNS를 넘기며 아무 생각이 없거나 해요. 요즘의 저는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할 일의 무덤에 파묻혀 조급하고 또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외면해버리기도 하고요. 늘 쓰는 다이어리를 사는 걸 미뤄서 이번 달은 종이에 일기를 적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그랬나.


생각이 끝이 나질 않아서, 그게 제가 집중하는 것을 자주 방해해서 꼭 그 다이어리를 지니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생각을 와르르 쏟아내곤 했어요. 그러고 나면 조금 더 길게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근데 또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거 있죠. 생산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 쓸데없이 낭비하면 그게 왜 그리 죄책감이 들던지요. 그렇다고 제가 늘 생산적으로 살아왔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에요. 자주 낭비를 하며 죄책감에 물든 채로 오래오래… 그렇게 살아온 거죠.


저희가 만날 때마다 서영님은 저에게 자기 객관화가 잘 된 사람!이라고 했었죠. 저는 그보단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개선해야 할 것을 잘 알지만 개선하지 않는 사람… 그걸 너무 잘 알아서 괴롭지만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러있는… 우리의 첫 만남 때 제가 아직 뚫지 못한 벽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걸 넘어선 소연님을 보게 될 날이 기대된다고. 그것은 제가 그 상태를 박차고 나와 변화를 위해 정말로 몸을 움직일 때, 그때 가능할 것이에요. 이걸 말로 내뱉었다면 서영님은 또 제게 자기 객관화가 잘 된 사람이라고 하셨겠죠.


우울과 무기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를 알아요. 그곳은 괴롭지만 편안하거든요. 이미 내게 익숙한 상태이니까. 괴로울지라도 익숙함에서 벗어나 거칠고 날것의 낯선 감정을 감각하는 것이 더 무서우니까. 제가 사람을 만나는 기준 역시도 비슷해요. 내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에너지를 주는 사람.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처럼요. 저는 저절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관계를 좇아요.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서서히 멀어짐을 택해요. 그게 맞다고 생각해 왔고요.


그리고 그 친구는 그런 제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아주 애써야 해요. 요즘은 아주 많이 싸웠어요. 제가 너무 바빴고 그 애의 소통 방식과 저의 소통 방식은 또 아주 다르거든요. 그 애는 명확하게 말하기를 원해요. 모든 것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요. 저는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는 건 좀 멋없다고 생각해요. 농담을 다 설명하면 농담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어떤 단발적인 말을 꺼내도 그게 곧장 이해되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대화. 그게 저는 더 익숙하거든요. 우리가 처음 만나서 대화하며 느꼈던 것처럼요.


저는 걔를 이해시키는 게 너무 지치는데, 걔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해요. 제가 너무 게으른 것일까요? 조금의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아와서 이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할 때라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보자고, 이것 역시 내가 뚫어야 할 벽이고 삶은 좋은 것만 주지 않는다는 마음과 나를 지키기 위해 빠르게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나란히 있어요. 그리고 평소처럼 포기해 버리려다가 참았어요. 의문이 든다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라 믿어서요.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전과는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요. 관계도, 나도. 몇 번의 파도가 지나면 알게 되겠죠.


서영님. 지금 제 눈앞에는 바다가 보여요. 바다를 보고 싶고 또 보여주고 싶어서 떠나왔어요. 저도 모르게 얇은 여름옷과 수영복을 챙겨 왔는데 어림도 없는 날씨예요. 걔가 가져온 단 하나의 후드를 제가 뺏어 입고 추위를 피해요. 반팔인 그 애는… 베를린 살 때 눈 오는 날에도 그러고 돌아다녔다니 뭐. 더운 나라에 오래 살았으니 이제 좀 추위를 타겠지만… 저를 힘들게 한 벌이라고 칠 겁니다. 다음 주엔 이러고 투닥거리는 것도 못할 거예요. 가족들이랑 유럽에 가거든요. 다음 편지는 스페인의 섬 어딘가에서 보내게 되겠군요. 지난 편지에선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길 지금 쓰고 있으니, 그땐 또 어떤 이야길 쓰게 될까요.


2023년 5월 25일

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