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네가 모르는 것, 네가 알고 내가 모르는 것

관계의 기술은 ‘인지’와 ‘무지’를 다루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by 연Yeon

소연님에게


그 친구를 불편해하면서도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소연님과 소연님이 자신의 말을 쉬이 따라주지 않는데도 춥다고 하면 단 하나 있는 후드를 내어주는 그 친구의 모습이 그려져서 입술 끝에 웃음이 맺혔어요. 멀리서 보면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방관자 같으려나요.


소연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무지의 영역’에 대해서 떠올려요. 나의 ‘인지의 영역’ 끝에 서서 ‘무지의 영역’을 바라보는 일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듯 모골이 송연한 일이죠. 마치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던 과거의 사람들이, 지구의 끝을 상상할 때처럼 말이에요.


‘인지의 영역’은 아늑하고 편안해요. 이미 너무 오래 머물러 모든 가능성을 다 확인하여 한없이 편안한 동시에 나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곳이에요. 그리고 ‘무지의 영역’은 정말 ‘무(無)’, 그 자체라 상상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곳이에요. ‘무지의 영역’에 발을 딛는다는 건,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는 일처럼 느껴지곤 하죠.


어느 순간 우리는 이 안락한 곳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기 위해서는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하지만 막상 낭떠러지 앞에 서면 몸은 얼어붙고, 몸을 던지라 말하는 머리와 얼어붙은 몸이 싸우면서 혼자 벌이는 난투극이 시작돼요. 우리는 이 난투극에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며 살아가는 듯해요. 난투극을 벌이면서 피어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다시 나를 짓누르는 바위가 되어, 몸을 더 굳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 머리 주변을 맴도는 벌떼같은 생각들에 지쳐서 SNS로 도피하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SNS라는 수면 아래로 꼬르륵 잠겨버리면, 적어도 그동안은 시끄러운 벌떼소리와 멀어지니까요. 그리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는 벌떼와, 낭떠러지 앞에서 흙먼지 일으키며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나의 몸과 마음을 만나게 되죠. 상상만 해도 어질한 광경이네요.


문득 소연님이 그 친구에게 끌리는 이유를 말해주던 날이 떠올라요. 소연님의 모든 빛과 그림자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늘 바라던 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얼떨떨하기도 하다던 소연님의 표정도요. 너무 차고 넘쳐서 지난 연인들이 소연님의 바람 앞에서 무엇이 힘들었을지 문득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던 지난 편지의 내용도 생각나고요.


사랑을 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러니까 나의 빛도 그림자도 모두 열어 보이겠다고 용기를 내는 순간은 아주 기대되면서 동시에 아주 겁나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겁에 질려 상대방에게 나를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해달라고 외치게 되는 것 같아요. 잘난 모습 말고 제일 형편없는 모습까지 보일 때, 사람은 너무나 유약하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나의 그림자가 포용되어 내 온 존재가 수용되면 그 온전함의 감각은 뭐라 말할 수 없죠. 그 친구는 아마 불안한 게 아닐까요. 자신의 ‘무지’, ‘결핍’을 용기 내어 열어 보였을 때, 끝까지 자신을 포용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게 아닐까요. 너무나 사랑받고 싶은 동시에 너무나 무서워서 ‘제발 사랑받을 수 있게 그리고 사랑할 수 있게 나를 안심시켜 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감히 짐작해 봅니다.


저는 사랑을 하고 관계를 가꾸는 ‘기술(테크닉)’은 ‘인지’와 ‘무지’를 다루는 기술 같다고 생각해요. 나의 ‘인지’와 상대방의 ‘무지’가 만나는 곳에서 끌림이라는 ‘인력’이 생겨나요. 상대의 ‘무지’는 나의 ‘인지’를 아주 강하게 대비시켜 나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죠. 그리고 나의 ‘무지’의 영역에 상대방의 ‘인지’가 있을 땐 상대방의 존재가 나에게 선명해지면서 매력을 느끼고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인지’와 ‘무지’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 같다고 생각해요.


관계에서의 행, 불행은 ‘인지’와 ‘무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결정되는 것 같아요. 행복한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무지’를 나의 ‘인지’로 채워줘요. 나의 ‘인지’를 선명히 만들어주고, 나에게 역할과 존재감을 선물해 주는 상대의 ‘무지’를 사랑하고요. 나의 무지의 영역에서 빛나는 상대의 ‘인지’를 존경하고 매력으로 느끼고, 나의 ‘무지’를 채워주는 상대의 ‘인지’에 나 또한 안락하게 기대어 흘러요. 둘 모두 ‘인지’하고 있을 땐, 연결감의 기쁨을 누리고, 둘 모두 ‘무지’할 땐 함께 바보가 되어 자유로움을 누려요.


불행한 관계는 정확히 반대에 있는 것 같아요. 불행한 관계에서는 나는 ‘인지’하지만 상대방은 ‘무지’할 때, 상대방의 ‘무지’를 ‘인지’로 바꾸려 해요. 왜 나와 같은 것을 ‘인지’ 하지 못하여 연결감을 못 느끼게 하냐며 상대의 ‘무지’를 탓하고 바꾸려들거나. 상대의 ‘무지’를 강조함으로써 나의 ‘인지’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기도 해요. 상대의 ‘무지’가 곧 나의 존재감의 토대가 되어주고, 관계의 인력을 만들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거죠. 나는 ‘무지’하고 상대방은 ‘인지’할 때는, 겁내고 불안해하고 스스로 위축되어요. ‘인지’와 ‘인지’가 만났을 땐 서로 자신이 맞다며 싸우고, ‘무지’와 ‘무지’가 만났을 땐 서로를 탓하며 싸우고요.


이것이 사랑의 야속한 점 같아요. 우리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끌리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인데. 그러다 보니 내가 가장 보호받고 싶은 약한 부분에 대해서 상대방은 자신의 능숙함과 익숙함으로 너무나 쉽고 거칠게 말하기 쉬워요. 나를 보호해 줄 거라 가장 기대한 사람인만큼 쉬이 아프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지죠. 반대로 나에게 익숙한 부분을 상대가 모르고 무서워서 우물쭈물할 때는, 내게는 너무나 당연하다 보니 쉬이 답답해하고 단정 짓고 판단하기 쉽고요. 그 순간 사랑은 저주가 되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큰 고통을 주는 것 같아요.


꾸밈없는 나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 받는 판단과 폭력이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지 알지만, 그럼에도 저는 ‘인지’와 ‘무지’를 드러내기를 포기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사랑을 만날 가능성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무지’도 ‘인지’도 모두 드러내야 저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사랑할 사람을 만나든 말든 할 테니까요. 생각해 보니 ‘무지’는 드러낼 수조차 없네요. 부지불식간에 새어 나오는 것일 뿐. 그러니 나의 ‘무지’에 대해서 그냥 수용(surrender)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어떤 관계가 행복하다면 그 반대편에는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수용해 주는 상대가 있음을 짐작해요. 그러다 어딘가 찌릿 아플 때면 나의 무지를 감각하고요.


사랑이 아니고서는, 나의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을 볼 기회가 있을까요? 포기하고 외면하면 이렇게나 간단하고 편안한데, 상대를 사랑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나 애쓸 수가 있을까요. 이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발을 뗄 생각을 감히 할 수나 있을까요? 낭떠러지로 내던진 나의 몸이 추락할지 비행할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 믿어요. 행복과 환희뿐만 아니라 공포와 고통마저도. 그마저도, 그 모든 순간마저도.


2023년 5월 30일

서영



사진 @Jeremy Bi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