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름을 가진 사나이
데이비드 돌린저 박사는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왔다가 5.18 광주항쟁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 중이고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때, 광주로 통하는 도로와 전화도 끊겼던 5월 21일, 그는 광주로 걸어 들어갔다.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시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그는 평화봉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즉시 한국을 떠날 수 있었고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에 남기를 선택했다. 외국인이 극히 드물던 시기, 소속도 없이 한국에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광주 시민을 돕던 외국인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행도 붙었지만, 그는 한국에 남아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다. '불온한 자료'를 열심히 날랐다. 거기에는 대학생들이 몰래 돌려보던 5.18 참상을 다룬 비디오도 포함되어 있다.
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요?”
유혈사태가 있다는 걸 알면서 왜 광주로 걸어 들어갔냐는 질문이었다. 임대운 박사는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광주에 있는 팀과 한국 친구들밖에 생각이 안 났다고 말했다.
팀 원버그는 광주의 평화봉사단원으로 전라도 지역의 평화봉사단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사교적인 그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를 '팀의 도시'라고 불렀다. 임대운 박사는 아들의 이름을 '팀'으로 지을 정도로 그를 아꼈다. 40주년 오마이뉴스의 특집 기사에 팀 원버그의 이야기를 알렸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057
임대운 박사는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 자주 한국을 방문했다. 해외입국자 격리면제가 시작되자마자 입국 일정을 잡아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한국에 올 때마다 평화봉사단원으로 근무했던 영암, 그의 인생을 바꾼 광주에 들른다.
한국에서 지내던 시기, 모두에게 ‘임대운’으로 불렸고 영암에는 아직 그의 도장이 인감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임대운이라 불리고 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늘 그를 ‘임대운 박사’로 부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8f3UAOzEtKM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