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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피디 Apr 17. 2020

5.18 푸른 눈의 증인 (1)

첫인상

무기력했던 작년 5월


2019년은 괴로운 해였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졌고, 매일 그 결과를 책임지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었다. 무기력한 마음으로 버티던 작년 5월,  메일이 왔다. 나는 출판사에서 영문도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메일을 보낸 사람은 출판사의 오랜 저자로 외국인이었다. 친구가 광주 관련 원고를 가지고 있는데 출판사를 찾고 있으며, 마침 한국에 있으니 미팅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보통 ‘광주’라면 5.18광주민주화항쟁을 말하는 것일 텐데, 궁금하기도 했지만 기계적으로 미팅을 잡는 회신을 보냈다. 미팅 날까지 바쁜 틈틈이 문득문득 궁금했다. 40년 전 광주항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음은 분명한데, 어떻게 광주와 관련이 있는 걸까. 곧 알게 되겠지.


첫인상, 저자 폴 코트라이트


당일 미팅을 하며 저자 폴 코트라이트의 그 표정을 보기 전까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80년 광주의 경험과 기억을 어떻게 감당했느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시종일관 침착하고 정중하며, 세련된 태도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더니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고 첫인상으로 각인되었다. 


회고록 memoir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데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담요’의 크레이그 톰슨, ‘나쁜 친구’의 앙꼬 등을 인터뷰한 경험이 있었다. 저자 폴 코트라이트는 그들과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달랐다. 아마 그의 이야기는 픽션이 되지 않고 사실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렬한 경험을  승화한 이야기는 독자에게 전달되는 힘이 있고 저자에게는 치료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미팅을 했을 때, 폴 코트라이트는 이미 원고를 완성한 상태였다. 나는 그가 원고를 완성하는 과정과 시간이 도움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1년 동안 저자 폴 코트라이트와 소통하고 도서의 출간을 앞둔 지금, 나는 그를 요란하지 않지만 부드럽고 꾸준하며, 강인한 리더로 생각한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오랜 의료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10월 영국 여왕에게 초대를 받았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무척 솔직하지만 예의를 갖추었고, 겸손했으며 강함과 연약함이 공존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그는 26세였던 1980년 5월 광주에서 평화봉사단 동료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2020년 한국의 출발점, 1980년 광주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거의 모든 것은 5.18광주민주항쟁에서 시작되었다. 40년이 지난 2020년의 한국은 그동안 쌓은 당연한 것을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면서 더 많은 것이 당연해지도록 해야 할 사회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오는 큰 반응은 ‘외국사람이 한국을 알면 얼마나 아느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 폴 코트라이트의 기록은 외국인이기에 더 큰 가치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한가운데에서 그와 평화봉사단의 이야기는 그들이 우리 중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었다.


본 것만을 기록하려 했던 저자에게 이 점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었을지 알고 있다. ‘광주의 목격자’라는 가제로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어 영어로 된 미국 대사관 자료와 당시 선교사들이 쓴 기록들을 접하면서 편집자인 나 역시 힘들어졌다. 그러나 ‘광주의 목격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이었고, 이것을 지켜야만 했다. 이 도서에서 편집자는 방어자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말을 아끼고 감정을 아꼈다. 감정적인 거리 두기는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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