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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4. 2021

만물의 어머니들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여신의 방귀와 화산 폭발(3)


| 일러두기 |
 서적·영화는 《 》, 논문·언론·그림은 < >, 법·조례는 「 」, 굿·노래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신화로 살펴보는 제주 문명사

1부  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제1장 여신의 방귀와 화산 폭발




만물의 어머니들


탐라지 | 국립민속박물관(emuseum.go.kr)


설문대할망 전설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이원조李原祚 제주목사가 편저한 《탐라지 초본眈羅誌草本, 1845》에서 찾을 수 있다. 《탐라지 초본》은 이원조가 제주 공가公家의 문서들과 관청의 사료들을 한데 모아 편집하고 제주의 자연과 풍습, 역사를 계절로 나누어 저술한 필사본이다. 제주도를 창조하였다는 설문대할망에 대한 묘사와 이야기는 도내에서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구전되어 왔다. 할망이 선녀 혹은 옥황상제의 딸이라는 설, 500명의 장군 아들들을 둔 거인 모신母神이라는 설, 제주뿐만 아닌 태초의 창조 여신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할망이 재미 삼아 배설물로 지형을 만들었다거나 성기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희화화된 각편도 존재한다. 근래 들어 일각에서는 제주를 대표하는 창조여신이 상스럽게 희화화되어서는 안 된다며 설문대할망의 출신과 생김새, 창조 배경을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적 관점에 따라 설화 내용을 전면 수정하거나 통합하기보다 다양한 각편의 원형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데 보다 이로울 것이다.


신화를 보편성과 특수성 중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화에 내재된 보편성은 문화적 산물로서 설화의 특징을 대변한다. 문화에는 특정 집단의 가치관과 사조, 풍습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신화에 산재한 특수성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철학자 리쾨르Ricoeur는 신화의 허구성과 역사의 모순성 간 교차점을 주목하여 보편성이 특수성으로 치환 내지 융합되는 현상을 지적하였다. 설문대할망 설화에도 원시인류의 보편성과 제주만의 특수성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현대 풍조에 부합하지 않는 원시 풍경과 고대인들의 생활양식을 적나라하게 비유한 신화는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신화는 숨기거나 배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역사적 산물이다.



오늘날 근친상간은 법적 혹은 관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지만 고대인들에게 이는 종족 번식과 혈통 유지를 위한 보편적 현상이었다. 지질학에서 초기 지구를 뜻하는 용어인 가이아Gaia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대지의 여신이자 만물의 어머니로 풍요와 자연을 상징한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들과 관계를 맺어 신과 거인족을 탄생시키고 자손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 올림포스의 신들을 탄생시켰다. 가이아의 증손자인 올림포스 최고신 제우스Zeus는 가이아의 또 다른 자식들인 거인족을 지하에 가두었다. 분노한 가이아는 아들 중 하나와 관계를 맺어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폭풍의 신 티폰Typhon을 낳아 제우스에 맞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티폰과 가이아는 패배하였고 제우스는 티폰을 시칠리아Sicilia 에트나Etna 화산 아래 감금하였다. 신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시칠리아 인근 열도에서 화산이 분화하는 까닭은 패배한 티폰이 지하에서 분노에 들끓어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 귀했던 고대 인류에게 화산 폭발은 가장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뿜어져 나온 대지의 뜨거운 피는 고대 선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음이 분명하다. 하와이Hawaii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는 펠레Pele는 대지를 삼키는 화산의 여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펠레가 하필 바다의 여신인 언니의 남편을 유혹하여 자매간 전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분노한 언니에 의하여 몸이 갈가리 찢겨 죽은 펠레의 육신은 하와이 군도의 섬이 되었고 영혼은 신이 되어 마우나로아Mauna Loa 화산에서 숨어 지낸다. 다른 각편에는 펠레가 도망치며 분을 못 참고 던진 용암이 군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펠레가 도망친 방향을 따라 하와이 군도의 남동쪽으로 향할수록 화산섬 형성 시기가 늦어진다. 구전에 따르면 킬라우에아 화산의 분화구는 여성의 질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하와이 현지인들은 화산의 잦은 분화 활동을 여신 펠레의 월경이라 여기며 성질이 난폭한 펠레가 발길질을 할 때 사방으로 용암이 튀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가이아와 펠레가 그러하듯 제주 설문대할망 역시 원시 상태의 자연과 풍요를 대변한다. 설문대할망은 몸속에 지니고 있던 불과 물, 바람, 온갖 생물을 풀어놓았다. 할망의 오줌에서 탄생한 각종 해산물은 제주 바다를 풍성히 하였다. 할망의 풍성한 머리칼처럼 우거진 수풀과 산록에는 나무마다 주황빛 열매가 올망졸망 맺혔고 거친 살결과 같이 메마른 대지 위에는 현무암을 빼닮은 검은 소와 돼지, 키 작은 말이 서성거렸다.







참고문헌


Aeschylus, “Prometheus Bound,” 김세영 역,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그리스 비극 1》, 서울: 현암사, 1999.

James Hamilton, Volcano: Nature and Culture, 김미선 역, 《화산: 불의 신, 예술의 여신》, 서울: 반니, 2015.


사진 출처 | unplash.com; 국립미술관(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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