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여신과 활화산의 원시인들 | 신과 함께 먹고살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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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원시인들은 할망의 오줌이 바다를 이루기 전에 대륙을 횡단하여 제주에 터를 잡았다.
설문대할망이 오줌을 쌀 때마다 제주 바다는 풍부한 해산물로 가득 채워졌지만 수심 또한 깊어져 갔다. 때에 맞춰 육로가 드러나던 연안도 점차 멀어져 갔다. 할망의 오줌이 이내 바다를 이루자 원시인들은 섬이 된 제주도에 고립되었다. 고립된 제주 원시인들은 할망이 몸속에서 섬으로 풀어놓은 풍요로운 생명체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은 바위그늘이나 용암 동굴에서 살며 설문대할망을 따라 들짐승을 사냥하고 때마다 영글어가는 과실을 따서 먹거나 땅을 파 둥글고 기다란 뿌리를 캐 먹었다. 바다에서는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하여 물질을 하거나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설문대할망은 제주 원시인들에게 바다 사냥을 하는 법을 보여줬는데 거대한 음문을 열고 물때에 맞춰 기다리다가 물고기들이 들어오면 음문을 닫아 가두는 것이었다. 원시인들은 거신巨神인 설문대할망만큼 거대한 음부가 없었던지라 해안가 지형을 이용하거나 바다에 돌담을 쌓아 기다리다가 물이 빠지면 안에 갇힌 물고기들을 잡아먹었다.
고대인들이 제주에 정착한 시기는 최소 23,000년 전부터 최대 29,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2010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서귀포 천지연폭포 인근을 조사한 결과 도내 최초이자 최고最古 선사시대 유적, 생수궤유적이 발굴된 까닭이다. 유적지 단면에서 출토된 좀돌날과 몸돌, 잔손질석기 등의 유물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후기 구석기시대까지 제주는 한반도 및 중국, 일본과 연륙 되어 육로 이동이 가능하였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빙하가 가장 발달되었던 최후의 빙기, 제4빙하기로 해안선이 지금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빙하 최대기였던 18,000년 전을 기준으로 그 후 기온이 점차 높아지며 설선雪線이 지구의 양극으로 물러나 해수면이 상승하였다. 이때 남쪽에 있던 해안선이 북상하며 제주를 둘러싸 섬이 되었다. 전설에서 설문대할망의 오줌이 흘러넘쳐 바다를 이뤘다던 때가 바로 이 시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15,000년 전이다. 황해는 평균 수심 44m, 최대 수심 103m에 불과한 얕은 바다다. 남해가 평균 수심 71m, 최대 수심 198m이고, 동해가 평균 수심 1,497m, 최대 수심 2,985m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120m 상승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 황해의 대부분이 당시에는 육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해는 전 지역이 대륙에서 연장된 대륙붕으로 완만한 해저 지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대 원시인들은 제주의 서쪽에서 현재의 황해; 당시에는 대륙의 일부였던 평탄 지대를 건너 제주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현재 제주의 해안지대가 당시에 해발 120m 내외의 낮은 산등성이였던 것이다.
제주의 선사유적지는 바다에 인접한 평탄 지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물이 귀했던 제주는 화산암반을 거쳐 해안가에 다다라서야 솟아나는 용천수가 맑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제주 고대인들은 생수를 구하기 쉽고 수렵과 어로가 용이한 해안지대에 터를 잡고 살았다. 세계 문명들이 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강이 없는 제주에서는 용천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용천수가 치유의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서귀포 대포동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불교 사찰은 몸에 바르면 상처가 낫고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약수터에 자리를 잡아 이름을 “약천사藥泉寺”라 지었다. 서귀포 남원 도내기물통에도 비슷한 전설이 내려온다. 제주 한림읍 귀덕2리에 위치한 굼들애기물에는 인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은 현무암 판석을 둥그렇게 두른 원통 안에 있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너른 해안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목욕탕이었다.
그 옛날 귀덕리 바다에는 인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한 인어가 고래의 습격을 받고 온몸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고래를 피하여 황급히 도망친 인어는 바닷물에 상처를 담글 수 없어 근처에 있던 용천수를 찾아 목욕을 하였다. 마침 용천수 근처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 인어는 사람의 눈길을 피하여 밤에만 나타나는지라 한낮에 등장한 인어는 서로가 놀랄 일이었다. 인어는 다급히 용천수로 뛰어들었고 사람들은 그런 인어를 보고도 못 본 척해주었다. 인어가 맑은 용천수에 상처를 다 씻고 바다로 돌아갈 때가 되자 비로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어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못 본 척 해준 배려에 감사 인사를 하고는 바다로 자맥질 해 사라졌다. 그 뒤로 이 용천수에 목욕을 한 사람들은 상처가 낫고 잔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귀덕2리에 있는 종교단체 중 일부는 굼들애기의 용천수를 종교의식에 활용하며 교인들을 치유하는 데에 쓴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이처럼 예로부터 용천수가 약수나 식수로 사용되며 생활 터전과 문명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제주 조천읍 북촌리에는 바다로 흐르는 용천수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와치물, 사원이물, 산리물, 우완물, 정짓물, 충지물 등을 포함하여 약 20여 개가 넘는 용천수가 북촌리 해안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1990년 발굴된 북촌리 선사주거지유적은 해안지대에 있는 동굴을 활용한 선사시대 바위그늘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탐라국시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맨 아래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후기 신석기시대의 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고 제4층위에서는 청동기시대 토기인 갈색 마연磨硏토기와 구멍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제3층위에서는 제주 초기 철기시대의 전형적 토기인 곽지식郭支式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제2층위에서는 철기시대 토기편과 함께 김해식金海式 토기편이 출토되어 탐라와 김해 간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제1층위는 삼국시대 문화층으로 곽지식 토기가 발전된 형태인 적갈색 깊은 바리형模樣型 토기 조각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일시적 집터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곳에서 무려 5층위에 달하는 문화층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용암동굴이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오랜 세월 제주 선인들의 집터로 애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에서 움집터는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고 있지만 거세기로 유명한 제주 바람 때문인지 해안가 용천수 인근에 있는 용암동굴이나 바위그늘 집터가 더욱 활성화되어 있다.
참고문헌
《귀덕2리지》, 제재 주시 귀덕2리 친목회, 2000.
국토교통부,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Ⅱ》, 수원: 진한엠앤비, 2017.
김경주, <선사·고대 제주도의 해양고고학적 궤적>, 《해양 제주, 그 문명사적 성찰》, 국립해양박물관, 2020.
신임철·이희일·정효상·권원태·천종화, <빙하의 녹음이 해양환경에 미치는 영향>, 《대한지리학회 2003년도 추계학회술표회 논문집》, 대한지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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