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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Oct 02. 2015

36. 너무 서둘렀던 나,  너무 서툴렀던 올리비에

2009년 올리비에가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그는 파리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좀 더 좋은 직장을 찾기 위해 실업상태였기에 쉽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었지만, 두 달 정도 한국에서 지내면서 한국어도 조금 배워보는 것도 고민해보기로 한 상태였다 (결국 한국어는 일정이 맞지 않아 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당시 나는 그가 온다는 결정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었고, 그가 도착해서 보낼 두 달의 시간 동안, 힘들었던 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늘 기대가 크면 어김없이 실망도 큰법... 이 공식은 절대 안변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올리비에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아픈 아버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으니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이번에 한국에 왔을 때 약혼 혹은 결혼식 같은 걸 하면 어떨까? 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에 그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몇 년을 살아보고 애 낳고도 결혼 안하고 그냥 사는 프랑스 문화에서 아버지가 아프니 우리 약혼또는 결혼을 서두르자! 라는 한국적 멘트를 날렸으니 말이다. 외국인에게 너무나 한국적 사고방식을 강요한 꼴이다. 하지만 그때는 뭐 미쳐 그의 입장까지 고려할 정신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온 답장 ‘응 생각해보자’를 당시로서는 그 대답만으로 내가 너무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채, 진짜 한번 생각만 해보자는 속뜻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올리비에가 생각해본대! 이번에 오면 결혼이야기 할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나 혼자 초 긍정 착각을 했던 것 것이다. 사실, 두 남녀가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크게 열기까지는 절대적으로 함께 보내야 하는 물리적 시간이 있는가 보다. (이제야 올리비에와 2년 반이상을 살아보고 느끼는 점) 2007년부터 2009년 그가 한국에 오기까지, 우리가 총 만난 시간을 따져보면 대략 2달 정도의 시간을 매일 만난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조금의 시간밖에 함께 보내지 않은 상태였는데 나는 너무 너무 빨리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고 앞으로만 쭉쭉 밀어부치려고 했던 거 같다.     


그리하여, 2009년 그가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고 초반에는 여전히 작년과 다를 바 없이 시차적응, 한국 적응하느라 연일 까칠한 모습이었다. 오자마자 결혼이니 약혼이니 이야기를 꺼내면 힘들어 할 거 같아 나는 그의 얼굴이 좀 좋아지면 이야기를 꺼내야지 마음먹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가 한국에만 도착하면 구원의 왕자님이 되어 줄 것만 같았나보다. 그러나 현실은 2008년의 초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서울에만 있을 때는 매일 매일 얼굴이 썩어 들어갔고 나의 실망감도 만만치 않았다.

왜 그렇게 서울에서 지내는 게 힘든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서울은 녹색이 많이 보이는 도시가 아니어서 답답하고, 걸어 다니기에 좋은 도시도 아니고, 8월이라 너무 덥고, 도시의 소음과 불빛이 너무 많아 잠을 잘 못 자겠고, 무엇보다 소연이 휴가를 낼 수 없으니 나는 도시에만 갇혀 있어 더욱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시간이 날때마다 혹은 여름 휴가 때 마다 그는 프랑스내의 자연을 찾아 휴식을 취해왔었다. 그런 스타일이었기에 그의 말이 영 이상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적응 못해서 힘든 당신보다는 아버지가 아파서 괴롭고 힘든 나를 더욱 케어해 주면 안되겠니? 하는 마음이 더 앞섰다. 결국 눈치 보며 꺼내지 못한 약혼과 결혼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도 시작하기 전에 지쳐 버려 분노의 감정까지 스물 거리게 되었다. 3주가 지나 4주차,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올리비에, 그러나 어디만 가면 자꾸 혼자 있으려 하고,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계속 받았다. 그리고 결국 친구가 사는 울산에 주말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그는 예정보다 일찍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실업급여를 받아야 하는데 빨리 프랑스도 돌아가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업급여가 큰 이유라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고, 힘든 나를 두고 그가 그저 도망가는 거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그 동안 언제쯤이나 올리비에가 기분이 좋아져서 그에게 약혼과 결혼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눈치만 보았던 내가 한심해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폭탄 맞은 기분으로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야간버스에서 5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집에 도착해서 혹은 낮에 차분하게 이야기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모두가 다 듣고 있고 조용히 자려는 야간버스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그가 너무 이기적인 거 같아 더 미웠다. 내가 눈물을 멈추지 못하자 그는 안절부절 못했지만 달리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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