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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5. 2023

구원자

어머니의 오빠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은 남다른 것이었다. 어머니가 늘 말했듯 남편에게 속아 결혼하여 그의 최종 학력이 초졸인 것은 그녀에게 상당한 콤플렉스가 되었다. 이 부분은 그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했고, 그 능력은 가게를 운영하고,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데에서 십분 그 가치를 발휘했다. 세 아이 중 맏이로 태어난 오빠는 이러한 어머니의 결핍과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최대의 희망이 되었다. 오빠는 늘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고, 어머니가 채워준 모든 영양가 있는 음식과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학교 성적은 늘 전교 상위권을 웃돌았고 어울려 노는 친구들도 오빠와 성격이 비슷한 순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런 오빠에게도 입시 스트레스는 상당한 것이어서 재수를 할 때는 고소공포증을 호소하면서 정신과 상담을 받기도 했다. 스트레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것으로 풀었다. 그런 오빠가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에 가게 되자 어머니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처음으로 품 안의 아들과 오랜 시간 떨어지게 된 것이다. 오빠가 자대 배치를 받은 후 훈련소에 입소할 때 입었던 옷가지와 운동화가 소포로 집에 도착했을 때 흙투성이가 된 그것들을 끌어안고 어머니는 오랜 시간 울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어머니의 지난한 편지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오빠를 면회하고 돌아온 후 어머니에게 가장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부대 분대장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에게 아주 기나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빠에게조차도 그렇게 긴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얼마나 착하고 여린 성정의 소유자인지, 자신이 어떻게 그 아들을 키워 왔는지를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면서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마지막 연애 상대였던 그 군인에게 부치지 못한 기나긴 답장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분대장이 어머니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오빠의 군 생활 내내 늘 편지를 부쳤다. 그녀는 그 일에 상당히 몰두해 있었고, 그녀가 그렇게 긴 시간 공을 들여 글을 쓰는 모습을 본 것은 그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식료품 도매상을 운영하던 것은 큰 보탬이 되었다. 어머니는 군인들이 좋아하던 초코파이며 짜파게티를 매 달 부대원의 숫자만큼 군부대로 부쳤다. 물론 오빠가 좋아하는 사천짜장도 따로 부쳐주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빠를 질투하거나 그가 아들이라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머니가 신기할 따름이었고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내가 딸이라서 특별히 오빠보다 못한 대접을 받거나 차별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육과 생활의 질 모든 면에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다만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혹독한 기준을 내세웠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나는 숨이 막힐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대학 입시 때까지였고, 대학생이 된 후로 어머니는 내 학과 공부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유년 시절의 그녀가 딸이라는 이유로 중학교에 갈 기회가 차단될 뻔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기에, 본인의 결단으로 열네 살에 스스로 서울에 올라온 것부터가 배움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오빠는 군 제대를 한 후 변해 있었다. 그는 예전의 유순하기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제법 거칠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본바탕까지 뒤바뀐 악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독한 기질의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가 제대를 한 시점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게는 급속하게 기울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대형마트 체인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대규모 자본에 의해 소상공인들이 타격을 입던 시기였다. 나와 오빠는 등록금을 대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춘천에서 국립대학을 다니던 동생에게 생활비를 부쳐주는 데 허덕여야 했다. 오빠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임용고시를 독하게 준비하더니 단번에 합격하고 말았다. 오빠의 졸업식 때 대학 교정에는 오빠의 이름이 새겨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때 어머니와 오빠는 그 플래카드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나 좋아했던가. 또 어머니의 자부심은 얼마나 부풀어 올랐던가. 오빠는 어머니의 모든 생을 걸고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자신의 남편과는 비교도 안 될 고귀한 존재였으며 모든 열정으로 빚어낸 빛의 소산이었다. 어머니의 나이 사십 대에서 오십 대의 시기에 그녀는 철저히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부산스럽고 소란한 일상에 자기 자신을 파묻어버림으로써 ‘자아’를 잃어버리는 고통스러운 행복에 몰입했다. 그녀는 자식 세 명을 모두 대학에 보냄으로써 인생 최대의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학업에 특출났던 오빠는 어머니의 고난에 찬 삶을 구원해줄 마지막 희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오빠는 경기도의 고등학교에 발령이 나면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오빠가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결혼 준비를 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이러한 자부심과 구원에 대한 열정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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