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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16. 2023

지상의 죄인

어머니가 예순 살이 되던 해에 오빠는 결혼했다. 결혼 후에 오빠는 자신의 가정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어머니에게 소홀하게 되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오빠가 의도적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 모두와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변화를 힘겨워했다. 어머니는 자주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헛되다고 말하곤 했다. 식료품 도매상 운영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남편은 쇠락해 가는 이 가게를 붙잡고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 빚낸 이자를 하루하루 메꾸어 나가기에 급급했다. 가겟세를 내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 갔고, 결국 보증금마저 모두 소진하게 되었다. 아들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어머니는 이에 대한 푸념을 나에게 늘어놓기 일쑤였지만 나는 반복되는 그 이야기들을 건성으로 들을 뿐이었다. 나에게 어머니의 푸념은 짜증스러운 일상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폭음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우는 날이 잦아졌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한밤중에 새끼 잃은 짐승의 창자 속에서부터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곡소리와 같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집 밖으로 나돌며 질 나쁜 연애에 몰두하던 나날들을 보냈다. 어떤 남성에게서도 나는 마음의 심연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남성에게서 다른 남성에게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불행을 처치하기에도 곤란했기에 자신의 딸들이 성추행을 당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으려 했다. 그것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였다. 우리는 상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외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던 셈이다. 나는 내 몸에 자행된 폭력의 흔적의 결과 수치심이 빚어낸 일종의 자기혐오의 과정에 있었다. 남자들과의 연애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그 혐오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광적인 애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의심의 뿌리는 깊었다. 그녀의 말대로 ‘속아서’ 시작된 결혼이기에 근본적인 불신이 내재한 관계 속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모텔에 가기 위해 인근 골목을 빙빙 돌다가 모텔에 불쑥 들어가더란 사실을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것의 진실 여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의심 속에서 분노와 애증의 감정을 끊임없이 표출시켰다.

나는 어머니가 가정의 테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남편이나 아들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습은 진심으로 넌덜머리가 날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경멸했다. 그녀의 광적인 애착은 나에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만약 나에게 교양 있고 인문 예술에 조예 깊은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니면 어머니가 비구니가 되어 종교적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현실 속의 내 어머니는 가정과 욕망의 문제에 끄달려 괴로워하는 지상의 죄인처럼 보였다.      

오빠의 아내가 무사히 첫째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탄으로 갔다. 서울에서 동탄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어머니는 수시로 요의를 느껴 지하철에서 내려 화장실에 가야 했기에 거의 3시간에 걸려서 가야 하는 길고 지난한 길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짜증을 냈다. 그렇게 우리가 간신히 새언니가 출산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는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오빠와 어머니의 사이는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도망치려는 오빠와 붙잡으려는 어머니의 갈등은 팽팽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싸움은 불가피했다. 두 사람은 병원 복도에서 격렬히 말다툼을 벌였고 나는 분노에 차 소리치는 어머니를 모시고 급히 병원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뒤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돈까스를 파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갔으나, 그녀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의자 여러 개를 끌어다 나란히 붙인 뒤 그 위에 드러누웠다. 누운 채로 자신의 아픈 몸과 분노와 슬픔을 삭이느라 두 손을 머리 위에 포갠 채 그렇게 있었다. 남의 시선이나 부끄러움 같은 건 더 이상 어머니가 신경 쓸 사안이 못 되었다. 부끄러움은 다만 돈까스를 입으로 넘기는 나의 몫이었다.  

그 부끄러움은 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배운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비해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아는 자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교양 없음이 부끄러웠고, 수치와 분노와 슬픔을 거침없이 세련되지 못하게 표현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분노나 슬픔은 그렇게 동물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세상에 이해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의 상처의 문제를 처리하기에 급급해 어머니의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자신의 불행한 서사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들이었다. 그리해서 나는 그녀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삶을 살아왔다. 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가려 할 때, 그녀는 집 앞 골목까지 뛰어나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그녀를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났다. 나는 아직도 그날 집에 혼자 남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날 어머니와 싸운 것이 아니라, 동생과 격렬하게 다투었다. 내가 가족들 몰래 남자를 방 안에 들였다는 이유로 동생으로부터 ‘더러운 창녀’란 말을 들은 직후였다. 어머니는 내가 남자를 데려온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듯했지만, 내가 집을 나가려 하는 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집을 떠난 이후로 나는 더욱 더 큰 사랑을 갈망하게 되었다. 내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오직 ‘불행으로 가득 찬’, ‘피해자’로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무력함에 대해 분노했다. 내가 분노하듯 어머니는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도,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분노해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어머니를 떠도는 삶으로 이끌었다. 내가 사랑을 갈구하며 떠돌았듯이. 어머니는 마치 산에 사는 늑대처럼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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