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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n 21. 2023

자궁, 동굴에 갇힌 여자들 (1)

어머니는 1952년에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에서 여섯 명의 오빠를 둔 막내로 태어났다. 당연히 남자아이일 거라 생각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이름을 다른 남자 형제들의 ‘호’자 돌림에서 이어지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열네 살에 홀로 서울에 올라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시절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눈에 쌍꺼풀이 지고 단발머리를 한 통통한 소녀였다. 얼굴에는 늘 미소를 띤 채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하고 영원한 미궁에 갇혀 버린 것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혼자 지낼 생각을 할 수 있었나, 였다. 내가 사진 속 여고생인 어머니를 보면서 “엄마 이때 되게 통통했네”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때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면 너무 허기져서 밥이랑 김치를 많이 먹어서 그래”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었을 텐데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교복을 갖춰 입고 학교에 가고 저녁이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다. 그럼에도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그늘지거나 우울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십 대 시절에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십 대 시절은 아주 세련된 패션으로 ‘아남’이라는 회사에 경리로 다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컬이 진 단발머리에 살이 비치는 검은색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동료들과 잔디밭에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면 그녀는 어느새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고 세련된 서울 여성으로 변모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가장 자유로웠고 그 어떤 남성에게도 구애받지 않던 이십 대 초중반의 삶을 나는 상상해본다.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도 아니고,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아내도 아닌 그때의 정호식이란 사람의 생애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머니에게 꿈이 뭐였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원래 뭐가 되고 싶었는지,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진에서 어머니는 곡선 패턴이 들어간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단풍나무 아래서 찍은 모습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친구가 많았고, 야외로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거야” 하는 말들을 친구들과 버스 안에서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결혼은 그녀의 모든 바람, 희망, 꿈, 야망, 욕망 들의 무덤이 되었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것은 아버지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무식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모순적이었다. 우리 형제에게는 아버지가 배움이 모자라고 성격이 소심하여 집안의 대소사를 잘 거느리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아버지의 식사, 질병, 구치소 생활까지 그의 모든 수발을 기꺼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세뇌된 탓인지 아버지의 어눌한 말투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무시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내가 태어날 즈음의 우리 가족은 늘 가난에 허덕여야 했는데, 그 정점은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삼 형제를 모두 집에서 출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둘째인 나를 출산했을 때의 일을 어머니는 가장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나는 설 연휴 때 태어났는데, 시어머니의 집에서 명절 음식을 하던 어머니는 양수가 터져 두 살인 오빠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산고를 치른 후 그날 새벽에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의 출생에 관한 어머니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헛헛한 것이었다. 그 누구의 보살핌이나 배려 속에 출산한 것이 아닌, 노동을 하던 중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탄 그 여성은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다. 그 불안과 결핍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 된 것은 이 ‘출산’이라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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