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버스와 도서관

by Soyeon Kim

아침잠이 준 남편이 혼자 커피를 마칠 때쯤이면 눈이 떠진다.

출근하는 남편을 간신히 배웅하고 보통은 불을 끄고 도로 눕는데, 그래 봤자 한 시간 남짓. 그나마도 온갖 잡다한 꿈을 꿀 때가 많아 '커피나 마시자.' 하고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서 '커피나 마셔야지.' 하면 어쩐다. 내일은 건강 검진이 있다. 또 무슨 추적 관찰 항목이 늘어날지 걱정이 돼서 어제부터 슬쩍 단식에 들어갔다.


막 동이 튼 창밖으로 유일한 지선버스 한 대가 소리 없이 지나간다. 학교가 많은 동네라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거나 저속으로 속도가 제한되어 있어 길을 지나는 운전자로선 속이 터진다. 갑자기 복통이 일거나 시간이 급한 동네 주민 운전자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효과가 있는데, 바로 차량의 소음이 준 것이다. 최신식 엔진일 리 없는 저 덩치 큰 버스가 이 새벽에도 조용한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 어두울 땐 버스 안이 유독 잘 들여다 보이는데 오늘은 승객이 한 명도 없다. 도심 속, 아니 제법 밀도 높은 주택가 한 복판의 섬 같은 우리 동네엔 우리 가족이 이사 온 23년 전부터 버스는 주욱 한 노선만 다닌다. 번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렇게라도 노선버스를 유지해주는 서울시 버스조합에 감사하다. 그게 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고등학교 덕이려니 한다. 고양이가 밥을 먹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고양이 오줌 누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새벽 버스에, 보다 정확히는 새벽에 심취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중 3 때와 대학교 1학년 봄.

첫새벽에 일어나 중학교 땐 걸어서, 대학교 땐 거의 첫 버스를 타고 새벽을 여는 사람들과 부스스 눈 뜬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중학교 땐 교실 뒤 편 쪽창 문을 넘어 들어가서 뜨는 해를 구경했고 대학교 땐 교문 옆 창살을 비집고 들어가 도서관 자리를 맡았는데, 공교롭고 기특하게도 쪽창도 창살도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곤 기를 쓰고 언덕을 기어올라 맘에 드는 자리를 맡은 다음 일단 자판기로 향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짜릿하고 쓸데없이 부지런한 객기만 기억날 뿐 열심히 공부한 기억은 없다. 그저 기숙사생이 분명한 웬 남학생이 냄새나는 수건이며 점퍼며 낡은 공책 따위를 이 의자 저 의자에 걸쳐놓고 엎드려 자다가, 친구가 와서 등을 툭툭 치면 침 흘린 얼굴을 들고 "그럼 난 간다." 하며 열람실을 홀연히 떠나던 기억만 또렷하다. 지금도 그런가 모르겠는데 그땐 죄다 스프링노트만 썼다. 자리 주인이 와서 "저기요, 여기 제 자린데요." 그러면 졸다가 황망히 고개를 든 학생-남녀 구분 없었다-의 얼굴엔 스프링 자국이 찍혀있기 일쑤였다.


책상에 엎드려 자던 이름 모를 그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등짝이 문득 그리워진다. 닳아서 끼익 끼익 찍 소리를 내던 여학생들의 값싼 구두굽 소리도 조금 그립고, 창가에서 치익치익 김을 뿜던 라디에이터와 그 위에 예외 없이 널려있던 누군가의 냄새나는 수건도 조금 그립다.


딱 이맘때였다. 이 집을 처음 본 것이.

앞산의 비탈을 잘라먹고 나날이 솟구쳐 오르는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타워크레인이 수평 이동을 시작했다.

2017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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