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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묘 Sep 04. 2022

침낭 안에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

네팔 ABC 트레킹

에베레스트는 항시
괴짜,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 구제 불능의 로맨티스트,
비현실적인 사람들을 유혹해 왔으니까.
<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ABC 등반 첫날. 

겨우 3시간을 쉬엄쉬엄 걸었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땀이 흠뻑 났고. 

포터의 몸에서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조만간 나에게도 그 냄새가 배겠지. 

하늘이 온통 뿌예서 산의 전망을 즐기기 힘들었다.

산에 무슨 인생과 철학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한숨이 나왔다. 

그냥 걷고 있다.

포터에게서 나는 땀냄새가 내 가방에서 나기 시작했다.

고대하던 점심시간, 포타나에서 쉬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식당 마당에는 주황 달리아와 노랑 장미가 예쁘게 피어있었다.

앞으로 힘들 등산을 대비해 밥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통통해졌다. 

여행 중 살이 찌다니. 

등산은 배도 빨리 고프구나.

빌린 침낭에 작은 거미가 살고 있었다.

다른 벌레는 없어야 할 텐데.

New 침낭이라는 가게 아기 엄마의 말을 믿다니.

나도 참 감이 떨어진다.


침낭 안에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 

고민하다 시계를 보니 겨우 pm9:50. 

일어나 스위치를 찾는데 손전등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불을 켜니 하얀 벽에 다리 많은 벌레들이 붙어있었다. 

혼자인 나는 엄청난 공포라도 혼자 맞이해야 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체온이 몹시 그리워졌다. 

누구 하나 기척을 내준다면 좋겠는데.


막상 화장실은 깨끗했다. 그리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은 상상 속에서 더 커지는 법. 

돌아와 벌레 한 마리를 책으로 쿵 잡고, 조그만 새끼 꼬물이는 휴지로 눌러 잡고, 

높은 곳의 꼬물이는 잡을 수가 없어 노려보았다. 

슬그머니 도망가는 꼬물이들.

몇 마리 더 잡으려고 했는데 사라졌다.

벌레가 적었던 맞은편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불을 켜 놓을까? 

그러면 깊은 잠을 자기 힘들 듯.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불을 끄고 침낭에 누웠다. 


점점 추워졌다. 

침낭 냄새는 아랑곳 않고 머리끝까지 촘촘히 막아보았다. 

지퍼 끝 아주 조그만 구멍만 안 닫히는데,

그 작은 틈으로 바람이 폭풍우처럼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구멍을 이리저리 막아보느라 밤을 지새웠다. 

또 아까 보았던 벌레들이 온통 주위를 기어다는 공상 때문에 여기저기 간지러웠다. 

발이 시리고 코가 시리고. 

무릎을 오므리거나 발을 주무르거나 하면서.

자다 깨다 선잠 속에서 이상한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거대한 벌레가 침낭 밑으로 들어와 꿈틀거렸다. 

나도 덩달아 기우뚱 흔들렸다.

이상한 기운이 훅 들어오더니 벌레가 도망칠 때 사라졌다. 

잠에서 깨었는데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밤이 새려면 먼 거 같기고 하고.

바늘구멍만 남겼는데 얼굴을 내밀었다가 또 고생일 테니. 

밖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나길 기다렸다. 

난다. 소리가 난다. 

발딱 일어나 보니 새벽 5시 25분. 

놀랍다. 잠이 든 줄 몰랐는데 제대로 잤다.

감자 커리를 먹고 아침 8시쯤 출발.

어찌나 발이 가벼운지. 훨훨 날아다녔다.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설산을 바라보며 걷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가파른 계단이 나오면 헉헉 숨을 몰아 쉬며 

내가 왜 이 고생을 할까?

왜왜 샴푸와 샤워젤을 통째로 가져왔을까? 

왜왜왜 얇은 침낭을 놓고 왔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탓하고 그래 봤자인데.


어젯밤의 공포 속에서 내가 과연 트레킹을 잘 끝마칠 수가 있을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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