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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묘 Sep 05. 2022

거미가 사라졌다.

네팔 ABC 트레킹

한 마리는 살려두자.
그래야 더 외로워질 테니까.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씻고 식당에 앉아 어둠이 산 위로 내리고 안개가 피어나는 걸 지켜보았다. 

이제 자야 할 시간. 

혼자 방에 들어가 자는 게 몹시 두려웠다. 

어둠이. 벌레가. 앞으로 남은 트레킹 7일이 두려웠다. 

돌아갈 포카라의 허름한 숙소가 두려웠다. 

인도 기차가 두렵고 바라나시가 두렵고 미리 예약한 인도 숙소들이 두려웠다. 

두 달은 너무 길었나?

아직 한 달이 남았는데 왜 이렇게 많이 남은 것처럼 느껴지지? 


침대만 달랑 있는 히말라야 뷰 롯지의 내방 10호에 들어서니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창 틀에 붙어있었다. 

어제 책으로 잡았던 꿈틀이들은 숨을 줄 모르고 벽에 떳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미는 됐고. 저 꿈틀이들을 잡을까? 

에이, 이제 익숙해져야 해. 포기해버렸다. 

하루 만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곤 적막 속에서 음악을 틀었다. 

음악이 방을 가득 채우니 한결 포근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외로웠다. 앞으로 남은 고독할 인생이 두려웠다.

더 나쁠 수 있는 불운에 그나마 위안을 얻으며, 힘을 내어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러 가는데 북극성이 보였다. 

별이 밝았다. 

얼음물에 씻어 손이 아직 얼얼한데 그사이 해가 떠올라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이 눈부셨다.

촘롱에서 히말라야 - MBC - 뱀부까지 3일 동안 일행이 생겼다. 

일행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뒤척이는 소리, 체온, 숨소리. 

잠잘 때 곁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만으로 아늑하고 외롭지 않았다. 

저녁 시간뿐 이나라 낮 시간도 빨리 지나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들었다.

사진도 많이 찍었고.

가장 고대했던 ABC와 MBC의 추억은 

산에 대한 기억보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았다.


혼자 하는 트레킹도 참 괜찮다. 

호박과 밀. 소가 좋아하는 잎. 그리고 향기 나는 들꽃들을 보았으니까. 

트레킹 6일째.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고는 파란 물통을 놓고 왔다. 

몹시 아쉬워 다시 돌아가 가져올까 고민했는데 포터가 말렸다. 

겨우 300루피짜리 아니냐며. 

적극적으로 나서 찾아주거나 노력하지 않은 모습이 순간 얄미웠다. 

미련을 못 버려 포터를 한참이나 미워했다. 

그러나 포터 말이 맞았다. 

포터는 사근사근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했다. 

겨우 500원 가지고 포터가 내 눈치를 보게 하는 건 

산에 오르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했더니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불과 4일 전에 묵었던 촘롱 숙소가 이렇게 아득할 수가. 

고독과 공포. 방과 화장실과 샤워실의 허술함에 잠시 눈물을 흘렸던 곳이건만. 

이제껏 내가 묵었던 롯지 중 이곳이 가장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다. 

큰 거미와 꿈틀이가 살았던 그 방에 다시 돌아왔다. 

거미는 사라졌다. 그날 거미줄도 치지 않더니 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은근 서운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거미를 찾았건만. 

트레킹 8일째.

8박 9일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타다빠니에서 마지막 방을 겨우 얻었다. 

2층 끝 방은 창고 옆이었고 아래는 부엌이었다. 

지지고 볶고 요리하는 소리와 냄새가 계속 올라왔다.  

바닥 장판은 모두 뜯어져 돌아다녔고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커튼 뒤로 오래된 쿠션과 이불이 버려져 있었다. 

옆 창고를 막고 있는 판자벽 틈이 온통 새까맸다.

이제 벌레와는 친구여서 두렵지 않았지만, 쥐가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밖은 축제로 소란했다. 

부엌의 소리와 축제의 소리가 초라한 밤에 활력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아주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늑하게 자는 법을 터득했다. 

침낭에 눕기 전 가슴 주머니에 랜턴을 넣고 불을 켰다. 

한쪽 호주머니에 아이폰을 다른 쪽에는 안경집을 넣고 

침낭 속에 푹 들어가 머리끝까지 지퍼를 올렸다.

숨을 쉴 수 있는 조그만 틈 - 사실상 더 이상 닫아지지 않아서 생기는 틈이지만.  

외 모든 틈을 없애고 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침낭 안은 음악으로 가득 찼다. 

허름한 방과 밖의 소란 속에서 나만의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음악은 침낭을 가득 채우고 내 몸을 타고 흐르다가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신비한 일이다.

옴짝달싹하기 힘든 좁은 공간만으로도 감사했고, 

오늘 하루 몸을 누일 수 있어 감사했고,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있어 감사했고,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아 더욱 감사한 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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