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글방 9기
“나는 백 살까지 살고 싶어, 언니.”
A가 말했다. A는 초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1년 동안 5, 6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그녀의 계약 내용이었으나, 한 달 만에 학교는 A에게 덜컥 3학년 담임을 맡겼다. 처음에 그 반을 맡았던 담임이 아예 교사를 그만둬버렸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다. 갑자기 가르치는 과목이 바뀔 수 있나 싶겠지만은 학교 관리자(교감, 교장)가 하라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느닷없이 3학년 담임이 된 A는 일주일 만에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선생님, K가 다른 반 애 때렸어요.”
“선생님, P랑 J랑 반에서 싸워요. 의자 던져요.”
A는 교실에서도, 급식실에서도, 심지어는 방과 후에도 싸우는 아이들을 몇 번씩 쫓아가 말렸다. 교사 경력 2년 차의 A에게 교사가 있든 말든 소리 지르고 싸우는 아이들은 능력 밖의 문제였다. 아이가 무인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말에 “애가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하는 학부모는 덤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A는 그냥 이전 담임 선생님처럼 그만둬버릴까 고민했다. 매일 밤 울면서 이 직업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게 깊은 우울감은 처음이었다는 A가 백 살까지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꽤 의외였다.
보통 그런 일을 겪으면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버겁고, 인간에 대한 환멸이 들면 말이야. 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고 회로다. 마치 큼지막한 돌을 하나씩 놓아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선택지가 없다. ’힘들다‘라는 돌을 밟으면 그다음 징검다리는 ’우울하다‘ 였고, ‘우울하다‘라는 돌을 밟으면 그다음은 ’죽고싶다’ 였다. 그다음 돌을 밟는 것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옆으로, A는 당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들도 다 그래. 백 살 넘어서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대.”
A가 덧붙였다. 가족들이 전부 그렇다고? 나는 퇴근 이후 낡은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 앞에는 다 마셔가는 맥주 한 캔, 락앤락 반찬 통에 담긴 땅콩이 놓여 있었다. 아빠의 손은 바스락거리는 땅콩 껍질만큼 건조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얼굴이 갈색이었다.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이 아니라 엷게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은 갈색. 티비에서 구순이 넘은 노인이 나오자 아빠는 말했다.
“어휴, 백 살까지 어떻게 살아. 오래 살면 뭘 해. 저 나이 되면 사는 게 지겹지 않을까.”
내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짓자 A는 나에게 되물었다.
“언니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어… 나는 백 살까지는 너무 긴 것 같은데…“
떠오르는 수많은 장면들을 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게 그냥 집안 분위기에 따라 다른 것 같아.”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건 정말 집안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유전일까. 18살, 나는 처음 겪어보는 우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견디기만 했다. 힘들면 찾아오라는 학교 상담실에서는 내 성적표를 뽑아 놓고 내신 등급마다 동그라미를 쳤다.
“이렇게 점수 낮으면 너 무슨 대학 갈래?”
그때 알았다. 상담실은 우울할 때 가는 곳이 아니구나. 우울할 때 가기 가장 좋은 곳은, 상담실보다도 독서실의 내 자리였다. 내 책상만큼의 스탠드 불빛이 들어오는 독서실 한 칸. 내 글이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표정이 보이지 않아 가장 안전한 곳에서 나는 일기를 썼다.
‘서른 살까지 자살하지만 않아도 내 인생은 성공이다.’
그 문장을 썼던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기분이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까웠다. 이건 그냥 중2병 같은 치기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기억해야지. 나중에 이 글을 보게 되면 별 오그라드는 문장이 다 있다며 비웃지 말아야지. 그리고 정말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서른 살까지 죽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 줘야지.
그 문장을 쓴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벌써 내후년이면 서른이니, 내 인생은 성공이라고 말할 날이 머지않았다. 나는 이제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방법도 알고, 무엇을 해야 내 기분이 나아지는지 안다. 우울한 날 들으려고 아껴두는 노래도 몇 곡 있으며, 기분이 좋은 날 더 좋게 만들어주는 플레이리스트도 있다. 손이 저려올 때까지 써 내려갈 수 있는 두꺼운 일기장도 있으며, 마음이 힘들 때 비상약처럼 떠올리는 장면들도 몇 개 가지고 있다. 비로소 ‘잘 지낸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야 깨달은 것은, 잘 지내는 것과 오래 살고 싶은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언젠가 이모가 환갑이 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득해진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언제 60까지 살아.”
60까지 사는 것도 까마득한 젊은이에게, A의 소원처럼 100살까지 산다는 건 선물일까, 저주일까.
”언니는 그럼 몇 살까지 살고 싶어? “
만약 A가 이렇게 물었다면 나는 대답했겠지.
”글쎄.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는데. “
그 문장을 쓰고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돌보는 방법은 배웠는데,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걸까. 나는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많은 것들을 알았고 능숙해졌지만, 그렇다고 무척이나 살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내일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굳이 힘을 들여 나 자신을 해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저승사자가 ‘너 여기에서 그만 살래?’라고 물으면 못 이기는 척 ‘그럼 그럴까요’하고 대답하는 상상. 10년의 시간은 상상해 본 적 없던 이런 마음 상태를 만들었다. 사는 게 나쁘지 않지만, 당장 내일 내가 사라지더라도 미련 없는 상태. 열여덟 살의 나는 이런 스물여덟이 될 거라는 걸 예상이나 했을까. 죽고 싶거나 아니면 무척이나 살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을 것이다. ‘서른 살까지 자살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라고 말했던 건 그때까지 삶이 견딜만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 삶은 견딜 만하다. 서른 살까지 자살할 계획은 없으니까. 동시에 ‘지금 내 삶이 견딜 만하다’는 말이 오만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또다시 죽고 싶어 지기 전에, 삶이 끝나버리길 조심스럽게 바라는 것이다. 당장 내일 갑작스럽게 죽으면, 정리하지 못한 일기와 지우지 못한 블로그 비공개글이 공개될까 걱정은 되지만, 100살까지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100살까지 살게 되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시간과 그나마 견딜만한 시간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살만하다 싶을 때 더 이상 상처받는 일 없이 마감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지. 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잖아.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을 때, 고통스럽지 않을 때 여기에서 딱 멈추는 것. 그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끝날 수 있다. 비로소 평화로워졌는데, 또 어떤 나쁜 일이 생겨서 모든 것들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꽤나 잘 살고 있는 것 같을 때 여기에서 문득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