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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milk Sep 14. 2016

케찹을 짜다가

변치 않는 우정...과 케찹

10년이 넘은 우정을 과시하는 친구는 몇 되지도 않거니와, 그 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 지기란 더욱 드문 일이다.



업무에 깔려 밤낮이 바뀐 몇 주를 정신없이 보내다 꿀같이 찾아온 추석 3일의 휴일. 임신 소식을 전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올바르고 당당하게 자란 아이로, 학창시절에 늘 자신감 없고 망설이며 내 모습이 무엇인지 방황하던 나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었었다.



화면이 초록색이던 폴더폰 시절, 수업시간 남친과 주고받은 문자를 보여주며 수줍게 자랑하고, 반에서 재수없는 아이와는 서슴없이 부딪히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아서 싸움이 날 뻔했던 일, 매일 같은 교복에 6교시까지 이어지는 같은 하루하루를 함께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추억의 하이라이트는 중간고사가 끝나면 KFC로 달려가 징거버거와 트위스터 세트를 시켜서는, 감자후라이를 쟁반에 다같이 수북히 쏟아놓고 일회용 케찹 모서리를 찢어 수다를 떨며 찍어먹곤 했었는데. (그리곤 노래방으로 달려가 괴성과 고성방가를 원없이 쏟아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 서울 모처에서 만난 우리는 우연찮게도 '브런치'를 먹기로 했고, 프렌치 토스트-스크램블 에그-소세지-샐러드-감자후라이로 대략 정의되는 그 메뉴를 받아들고 접시에 일회용 케찹을 짜고 있는 내 모습에서 놀랄 만큼 그때의 우리가 오버랩 되는 게 아닌가.




난데없는 케찹 옹호론이나 감성팔이스런 케찹 PPL은 아니면서도...



철없는 고등학생 땐 같이 매직스트레이트를 하러 가고, 스무살엔 귀를 뚫으러 가고, 그 발걸음이 몇 년 뒤엔 그녀 결혼식에 부케를 받으러, 또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엔 친구와 친구 아이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되는 동안 케찹은 계속 그 자리에 있지 않겠나 싶었다.



피곤한 일상에서부터의 탈피가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영감, 또는 쓸데없는 공상을 안겨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바쁘게 달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epiphany현현의 순간이 얼마나 허락될까 싶은 생각에 그 친구와의 만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나는 사람들은 많고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도 긴 시간동안, 많은 것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 삶의 현상들은 우리를 지나갈 뿐이다. 등교를 하다가 출근을 하고, 학년이 올라가다가 직급이 올라가고, 부모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가 나의 가족이 생기고, 책임질 것이 많아 어깨가 무거워진다. 가는 시간을 막을 수도, 일어날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없지만 일상에서 소소한 의미부여나 재미찾기로 실컨 떠들어 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행복이자 모두 같은 것을 겪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구분하는 무한한 경쟁력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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