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후, 단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윤 과장, 이것 좀 해줘"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전도자금 마감이 이미 코앞이었고,
책상 위에는 할 일이 쌓여있었다.
"오늘은 어렵습니다."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꺼내지 못했다.
나는 익숙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돌아보면 나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짧은 문장이 마치 내 명함 같았다.
하지만 말하는 그 순간마다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씩 쌓여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가방보다
그 돌덩이가 가슴속에 얹힌 듯 답답했다.
나는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남에게 성실하게 보이고 싶어서,
관계가 어긋날까 두려워서,
불편한 사람으로 찍힐까 겁이 나서.
두려움을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늘 나를 희생하는 길을 선택해 온 셈이었다.
"오늘은 어렵습니다"
그 한마디만 했어도 퇴근길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내 할 일은 뒤로 미뤄졌고, 나에게 화가 났다.
남에게 거절 못한 나를 탓하며 모질게 대했다.
오늘 아침,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다.
또 다른 업무가 추가되었다.
온몸이 긴장했지만 이번에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오늘은 제가 일이 많아서 어렵고 내일은 가능할 것 같아요."
순간 잠시 정적이 흘렀고, 심장이 요동쳤다.
이어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래, 내일까지 해줘"
그뿐이었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관계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세상이 아니라
용기 내지 못한 내 마음이었다.
그날 퇴근길은 오랜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때 알았다.
거절은 상대를 베어내는 칼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라는 것을.
울타리는 관계를 끊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가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 필요한 경계였다.
울타리가 없을 때는 안과 밖이 뒤엉켜 모두가 흔들렸다.
그러나 선을 세우자, 내 마음은 조금 단단해졌고,
관계도 생각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이 짧은 거절의 한마디가 내 하루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거절의 자리에 물 한잔과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겉으로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속으로 수없이 스스로를 소모하지 말아야겠다.
이 다짐 위에서 하는 '예스'와 '노'는 더 이상 나를 해치지 못했다.
오히려 거절은 나를 지키는 문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