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인연이 나의 길이 되다.
유학 시절 지인의 여름 별장에 초대되어 일주일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아이 넷과 엄마가 여름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아빠만은 클린턴 대통령 정부의 각료로 일하고 있어서 주말에만 온다고 했다.
주말이 되어, 휴양지에 어울리지 않는 양복차림의 아빠가 도착하자, 네 명의 아이들은 반가움에 달려가 안겼다. 온 가족이 같이 저녁을 먹고는, 아빠는 중학생 첫째가 읽은 ‘데미안’부터 다섯 살 막내가 읽은 동화책까지 한 명씩 돌아가며, 그 주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이 바쁜 아버지는 몸으로 같이 할 수 없었지만, 1대 1 아이들 독서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책을 읽는 동안 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저녁만 되면 책을 들고 있었던 거구나. 그 순간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저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아홉의 노처녀(나 때는 스물아홉의 싱글 여성을 그렇게 불렀다.) 딸이 미국 경영대학원 입학허가서를 내밀며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딸의 결혼이 유일한 기도였던 부모님은 거기서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다. 결국은 유학 때 만난, 친한 친구를 통해 만난 인연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부모님의 기도가 영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은 ‘문사철’을 높게 평가하시던 시아버님의 이끄심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2016년까지 26년을 기자로 일했다. 고전의 지혜를 통해 현재 사회 문제들의 해법을 찾는 그의 칼럼이 너무 좋았다. 그의 집에 꽂힌 수백 권의 책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유학시절 내가 꿈꾸었던 ‘아이들과 거실에서 읽은 책의 내용을 토론해줄 바로 그’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빨려 들어가듯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책을 사랑했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전, 철학, 리더십, 중국, 미래 경영 분야 책들을 집에 한 가득 가져와 식탁 위에 쌓아 놓았다. 나를 위해 육아, 교육, 재테크 등 기대치가 반영된 분야의 책들도 가져왔다. 책을 좋아하는 남자와 그 남자가 가진 책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한 나에게, 그 남자가 가져오는 책은, 어느 순간인가부터 나에게 짐이 되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책들만으로도 책장이 꽉 찬 상태서, 한 달의 스무 권쯤 남편이 새 책들을 가져오는 데다가, 나도 새로 읽고 싶은 책들이 있으면 새로 사들여, 우리 집은 언제나 책장이 터져 나갔다. 처음엔 세로로만 책을 꽂다가 나중에는 책 위. 아래에 가로로 책이 눕혀져 꽂혔다. 그리고는 더 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어지자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과 나는 공간에 대한 취향이 정 반대였다. 나는 공간이 최대한 비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 남편은 공간이 선반이나 장식장 공간이 비어 있으면 물건으로 채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는 성격이 매우 급해 무엇이든 생각이 들면 그 즉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남편은 느긋한 성격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책을 정리하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책은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읽어야, 터져 나가는 책장 안에 자리를 마련해줄지, 아니면 남편 모르게 재활용 쓰레기에 내다 놓을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우리 집 식탁에 도착한 책들을 읽어서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하는 일이 나의 주말 아침의 루틴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결혼한 나는, 남편이 만든 도서관의 사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책들을 가져 다만 놓고 정리는 내 몫이냐며 불평을 하면서도, 책이 주는 재미에 빠져 책을 읽고 독후감을 다시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남편은 그다음에 읽을 고전을 소개해주는 미니 도서관장과 1인 독자 및 사서로서 같이 살아왔던 것 같다.
정리를 위한 책 읽기를 통해 느낀 건 고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고전의 저자들이 이미 인간의 질문과 그에 대한 생각들이 정리했고, 그 이후의 나온 모든 책들은 개인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고전의 부록인 듯했다.
일례로 남편의 추천으로 읽게 된 루소의 <에밀>은 내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육아서들은 기술이나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낳은 두 명의 아이만도 전혀 다르다. 아이마다 키우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 ‘무릇 만물은 본성에 충실할 때 강하다’며 ‘천성을 살리는 교육’을 주장한 에밀은 나의 아이 교육의 바이블이 되었다.
3년 전 일을 그만둔 후, 길을 구하며 성경공부의 유익을 경험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싶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학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학원 빼 주는 대신, 주말 30분 성경공부를 하자고 했다. 마지못해 식탁에 앉은 아이들은 내가 창세기 1장 천지창조 부분을 읽기 시작한 후 얼마 안가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안 듣는 줄 알았던 남편이 질문을 던진다. “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했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고 했고. 그럼 네가 하나님이라면 너는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겠니?”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큰 아이는 우주의 큰 공간안에 인간을 작은 공간에서만 한정시켜 살게 해서 오염의 공간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작은 아이는 가운데에 지구를 만들고 양쪽에 선의 행성과 악의 행성을 두어 인간들이 선과 악을 체험하고 중심을 잡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엄마의 강제로 시작한 성경공부시간을 재미있는 '창조의 시간'으로 바꾼 아빠를 아이들은 무한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결혼 전, 아이들과 책을 토론해줄 남편을 찾았던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가 가져다 놓은 수많은 책을 정리해야 했던 순간들도, 그가 바닥에 벗어 놓은 양말들을 집어올려 세탁기에 넣었던 수많은 순간들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 고전 공부는 자신을 배우는 공부라고 말한다. 에세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역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던 몽테뉴도 <수상록>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내가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요즘처럼 ‘자신을 잘 아는 것이 경쟁력이 되는’ 세상에, 남편이 만든 미니 도서관의 문을 다른 사람에게도 열어, 자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고,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도서관의 사서로 기꺼이 책들을 정리하고 대접할 차를 준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