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꿈

물건의 의미, 쇼핑의 의미

by 블루비얀코

남편과 함께 쓰는 사무실이 위치한 정동 근처 시청역 지하도는, 나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영감의 공간'이다. 우선, 사시사철 어떤 기후상황에서도 편안하게, 책을 빌릴 수 있는 서울시 도서관으로 갈 수 있어 늘 감사하다.


또, 40년 이상된 자개공예, 보석공예, 골동품 가게들이 있어, 관심을 가지고 작은 물건을 구입하거나 구경을 하면서, 사장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분들께서 오랜 기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얻으신 지혜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남다른 재미가 있다.


특히, 서울시내 호텔들과 백화점으로 연결된 이곳은 어느 곳보다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던 곳이라 그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이나 쇼핑 취향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는 별도로, 같은 동양문화권 안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이고, 중국은 우리에겐 가장 큰 시장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글로벌 시대 우리의 유통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취향과 쇼핑 성향을 알아두는 것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또한, K-문화가 세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이때에 외국인들이 관심 있어하는 한국의 공예품이나 물건에 대해 안목을 키우는 것도 앞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겨 힘들어하시는 사장님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위기를 틈타 SNS와 온라인 판매 등 다양한 활로를 개척하고 계시는, 수십 년 K-문화의 선봉대로 외화벌이와 국위선양의 산증인이신 이 사장님들께서 부디 이 시기를 잘 넘기셔서 나라 간 여행의 문이 다시 열리는 때, 더 큰 수확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이곳에 얼마 전부터 재미있는 샵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개인들이 소장한 그림, 골동품, 주얼리를 다시 내다 파는 '개인 소장품 샵'들이다. 젊은 층으로부터 시작되어 사용했던 물건들을 사고파는 '빈티지 문화'가 성수동, 한남동, 청담동 등 이른바 트렌드의 핫 플레이스를 중심으로 생겨나더니 이곳 시청 지하도에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겨 노크를 하고 들어가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작은 물건 위주로 하나씩 구입도 해본다. 그러면서 느끼는 건 그분들은 하나같이 물건을 단순한 물건만으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거다. 그분들이 평생을 거쳐 자신들의 돈을 주고 산 물건들이고, 또한 평생 잘 사용하고 아끼다가 그 가치를 좀 더 합리적인 가격에 남들과 나누겠다는 뜻으로 연 샵이다. 그들 평생의 손때가 묻어있기 때문에 샵의 물건 하나하나가 그분들에게는 자신들의 과거 역사요, 마음이요, 정성인 것이다.


'개인 소장품 샵' 물건들은 원래 물건의 가치에, 사용해 본 주인장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이야기가 두배로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또한 오래 버텼다는 건 물건이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고, 샵에서 다시 팔릴 만큼 잘 관리해왔다는 건 그만큼 사랑받았던 물건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거쳐 보증된 품질과 이야기를 얻고 싶어 골동품을 사고 빈티지 샵에서 물건을 고르는 듯하다.


지난겨울, 새로 생긴 '개인 소장품 샵'에 쇼윈도에서 달팽이 브로치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작은 사이즈의 브로치에 중앙에는 진짜 달팽이의 부드러운 속살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달팽이집의 줄무늬와도 같은 연한 줄무늬가 그대로 살아있는, 힐링의 힘을 가졌다는 수정 '아게이트'로 보이는 핑크색 원석이 박혀있었고, 주변으로 은은한 광채를 내는 '마카사이트'라는 원석이 장식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디자이너가 핑크색 원석을 보고 달팽이가 떠올라 정성을 다해 만들었으리라.


그 이후로 몇 개월 동안 책 빌리러 도서관에 갈 때, 백화점에 장 보러 들를 때마다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쇼윈도에서 그 아이가 아직 있는지 확인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언젠가 공돈이 생기거나, 아님 우울하거나 힘들어서 버틸 힘이 필요한 날, 저 아이를 꼭 손에 넣으리라 다짐했다.


얼마 전, 학업 관련 이야기를 하던 내게, 앙칼진 목소리로 방에서 나가 달라던 중학생 큰 아드님의 '도움'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어느 날, 머릿속엔 그 달팽이가 떠올랐다.


그 날 나는 그 달팽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사장님께서는 브로치를 가장 예쁜 공단 주머니에 넣어 주시며 "진짜 귀여운 아이예요.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여기저기에 다재다능하게 쓰였던 아이야." 라며 "사랑하던 아이가 사랑해 줄 새로운 주인을 만나니 기쁘네." 하셨다.


주머니 속 달팽이를 만지작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전의 처진 기분은 온데간데없었다. 요즘 소확행은 '소비는 확실히 행복해' 를 뜻한다더니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더듬이를 비쭉 세우며,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느릿느릿 가고 있는 듯 한 그 달팽이 브로치를 화장대에 두고 보고 또 보면서 핸드폰을 검색해 달팽이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달팽이가 기어가면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했고 또한 달팽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일컫는 일이라고 했단다.


아! 가수 이적님의 불후의 명곡 '달팽이의 꿈' 가사가 그 이야기구나!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그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노래를 듣고 또 듣다 보니 어느 순간인가 내가 왜 그 달팽이에 끌려 쇼윈도앞에 매달려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래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일을 아이를 키우기 위해 그만두고 느꼈던 허탈한 상황, 운명의 실타래를 꼬아 놓은 듯한 신에게 화를 내며 내 길을 보여달라고 울부짖었을 때, 신은 희미하게 '인문학과 글쓰기'라는 파도 소리를 들려주었고, 살림하고 아이 키우면서 새벽시간과 늦은 밤 짬을 내, 내가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찾아 꿰어가며, 그 수많은 책장들을 넘기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던 시간들 속의 나를 향해 그 달팽이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바다는 멀고 또 거칠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한, 그 파도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바다를 건널 거라고.


그 바다의 정체는 알 수도 볼 수 도 없지만, 그래도 이 글들이 모아져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지는 순간 13년간 몸의 마비라는 장애와 간병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시며 자식을 향한 사랑의 끈을 놓치지 않으시는 나의 영웅이 되신 아버지와 어머니께 그 책을 바치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엄마가 다시 일어섰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것만으로 오늘의 이 느리며 답답한 달팽이 걸음은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달팽이는 단순한 물건 그 이상이었다.


새로 문을 열어 코로나 상황에도 사람들이 몰려 주차장에서 식당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쇼핑몰에 다녀왔다. 새로 지은 대형 건물 곳곳에 물건이 차고 넘쳤다. 저 많은 물건들은 누가 다 사 갈까?


아무리 경기가 안 좋아도 돈은 결국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어떠한 물건이든 만들면 팔리는 시대서, 예뻐야 팔리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이유가 있어야, 이야기가 있어야, 철학이 있어야 팔리는 시대가 됐다. 이것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히 적용되는 트렌드인 듯 하다.


코로나로 인해 그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생명이 위협받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눈 앞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에 관심을 두게 됐다. 최근 들어 인문, 종교 책이 더 많이 팔리고, 여기저기 관련 온라인 강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의미를 갈망하고 더 깊은 가치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와 철학자가 밥 못 먹고사는 시대로부터 예술과 철학에서부터 이끌어진 의미를 사람들의 삶과 연결하여 가장 맛깔나게 풀 수 있는 스토리텔러들만이 비싼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시대가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인문학 책을 편다. '인간들이 오랜 세월을 걸쳐 그려 온 무늬'라는 인문학을 통해 인간에 대해 배우고 인간의 갈망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기 위해 엄마로 주부로 치열하게 살며,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맛깔나게 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의 실타래를 푼다.


그 바다의 끝은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게 들리는 파도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밥 먹여주는 시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