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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Dec 04. 2020

60퍼센트의 행복

어려운 상황을 지나는 지혜

지난해 여름, 아이들과 함께 사촌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버클리, 스탠퍼드 등 지역 대학교 캠퍼스도 돌아보고, 특히 제부가 다니는 구글 사무실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무제한 뷔페를 맛본 아이들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해외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때가 오나 싶었다. 


본격적인 유학 수속을 밟기 전, 미리 언어나 문화에 적응하면 좋을 것 같아, 지난가을, 아이들을 공립학교에서 크리스천 대안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서울에 소재한 작은 규모의 학교로, 선생님 모두가 미국인이고, 미국 홈스쿨 교재로 유명한 Bob Jones College의 교재들을 활용하여 교육하는 학교다. 특히 학교에서 성경을 교육하는 점이 좋았다. 아이들도 인터뷰를 하면서 미국인 목사님이신 교장선생님을 만나 뵙고, 좋을 것 같다며 용기를 내어 전학을 하겠다고 했다. 


초등 5학년이던 둘째가 먼저 학교를 옮겼고, 한 달 후 중 1 첫째도 전학을 했다. 그런데 전학 후 적응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로만 수업을 하고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100% 영어로, 한글로도 어려운 성경을 영어로 읽고 이해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한국 학교에서는 학교 수업의 부담이 적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시스템인데, 사교육 없이 학교 공부로 모든 필요한 학습을 하게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 학교에서는 숙제의 양도 많았다. 공립학교를 다닐 때, 방과 후 학원도 무리한 선행은 하지 않고, 운동, 책 읽기, 과학 실험, 그림 그리기 등의 부담이 적은 수업 위주로 생활을 했던 아이들로서는, 밤늦게까지 책을 보며 숙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인지라 울면서 숙제를 하는 날도 많았다. 


낯선 언어와 환경, 미국인 선생님들과 관계 적응 등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던 것 같다. 한국 학교에서 학급 회장 등을 하며 자신감 넘치게 생활했었는데, 영어로 이야기는커녕, 선생님 수업 내용 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감이 급강하했던 것 같다.

 

매일 등. 하교 시에 보는 아이들 얼굴이 우울했다. 스트레스로 몸이 아파 결석도 자주 하게 되었고, 특히 첫 성적표를 받은 후, 난생처음 받아 보는 낮은 점수에 아이 둘 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이의 얼굴이 어두우면, 엄마의 마음은 타 들어간다. 그럴수록, 지친 아이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학업을 도와주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 안간힘을 쓰느라 더더욱 힘들었다. 


나 또한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수영장 강습 과정에 등록을 했다. 어릴 적부터 몇 번 수영을 배우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늘 자유형 호흡이 고비였다. 킥판으로 발차기는 하겠는데, 호흡만 하려고 하면 아무리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수를 해도, 수영장 반을 못 가 숨이 차서 일어서곤 했다. 그저 폐활량이 좋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수영장 반쯤 가서 일어나 헐떡거리는 나에게 코치 선생님이 ‘회원님, 수영하실 때, 호흡을 크게 하시지 마세요. 그저 최대 호흡의 60%만 하세요. 그리고 호흡을 할 때는 최대한 몸의 움직임을 줄이세요. 그래도 물에 빠지지 않아요. 의식하시고 몸에 힘을 주시고 과하게 호흡을 하시면, 힘이 들어가고 무리가 되어 끝까지 가실 수가 없어요.”


선생님 말씀 대로, 호흡하는 입도 조그맣게 벌리고 발차기도 중지한 채, 호흡을 했다. 그러고 나니 한번, 두 번 예전보다 팔을 더 저어도 참을 만했다. 가슴이 살짝 조여 오는 듯한 순간, 25m 끝 벽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꾹 참고 한 번 더 팔을 저어 뻗었다. 벽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옆 레인 상급반 어머니들이 열 바퀴, 스무 바퀴를 돌고 있는 옆에서, 나는 인생 처음 25m를 쉬지 않고 갔다는 생각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60%만 하면 되는 거였다. 아니 처음이니 60% 만해야 끝까지 할 수 있는 거였다. 한번 해보니 두 번째, 세 번 째는 자신감도 붙고, 쉬워졌다.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처음이니 60%가 아니라 30%만 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어야 하는데, 시작부터 나도 아이들도 100%를 하려고 하니, 안간힘을 써도 힘만 들고 지치는 거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엄마가 오늘 수영을 배웠는데 코치 선생님이 호흡할 때, 숨을 60%만 쉬라고 하시더라. 너희도 학교서 100을 목표로 하지 말고 60을 목표로 해봐!”


“엄마! 60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럼 30만 해봐. 아님 10!” 


그렇게 그저 아무 소리 없이 학교만 가주어도 고맙다는 생각으로 1년을 보냈다. 성실한 품성을 지닌 둘째는 빨리 적응하여 얼마 전 우수학생으로 뽑혔고, 사춘기 예민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첫째도 사랑으로 품으시는 선생님들 마음에 감동하여 여러 가지 프로젝트 안에서 길을 찾아가고 있다. 


얼마 전, 둘째가 아침에 책가방을 둘러매며 이야기한다. “엄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인 거 같아.” “네 나이에 그걸 깨달았으니 네 인생은 탄탄대로겠는데!”


팬더믹으로 모두가 힘들다.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을 버티기도 힘들고, 국민도, 기업도, 나라도 다 힘들다. 위기 상황에는 그저 기대를 낮춰야 하지 않을까? 남에 대한 기대는 더 많이 낮추고, 나에 대한 기대도 낮춰야 끝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물을 주지 않아 말라가던 동양란 화분에 꽃이 피었다. 조금 더 시들면 내다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그 어려운 상황을 참고 꽃을 피운 그 생명이 너무나 기특하고 감사했다. 그저 조용히 자신 안의 생명의 기운에만 집중하며 꽃을 피운 그 난처럼,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꽃을 피워 보자고 생각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맨손 체조도 하고 책도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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