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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Jul 19. 2021

사랑으로 이야기하기,이야기로 사랑하기3-노인과 바다

책을 통한 나눔의 희열

한 프랑스 사업가의 이야기이다. 서울에 와서 명예시민 자격까지 얻은 그는, 정동길 오래된 문화재 건물 한 층을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문 멋진 사무실을 만들어냈다. 


“당신은 무얼 위해 이런 일을 합니까?”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내 아들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짧게 답했다.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유럽인의 취향일 것이라 생각했을 뿐, 그 말 속 깊은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이후 십 년 동안,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정신’을 그대로 담아낸 그 사무실에서, 그가 이끄는 기업체는 유서깊은 전 세계 명품 브랜드들의 디지털 브랜딩 파트너로 눈부신 성장을 해오고 있다. 


아버지를 위한 낭독 프로젝트의 세 번째 책은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골랐다. 유명한 책이니 읽어보라고 애들한테는 여러 번 잔소리를 했지만, 정작 나는 앞부분만 읽다 접어 둔 책이었다.  


1장을 낭독하는 데, 나이 든 어부와 사랑하는 소년의 대화가 너무나 정감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께 파일을 보내드렸더니, 조금있다 ‘오늘 보낸 노인과 바다는 너무나 정감이 있으며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당신의 사랑이 느껴지네요. 우리만 듣기 송구합니다(하트)(하트)(하트).’ 하며 메시지가 왔다. 


사실 부모님께 파일을 보내 드리며, 책 읽기가 쉽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장 고모님들과 단톡방을 열고 메시지를 보냈다. 

‘고모님들, 어지러운 세상 속 평안하신지요? 얼마 전부터 아버지를 위해 책을 낭독해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 느껴져서요.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위해 ‘노인과 바다’를 골랐는데 고모님들께도 보내 드립니다. 심심하실 때 인사 대신으로 들어주세요~’


저녁 무렵, 큰고모님께서 답을 주셨다. 고모님은 아버지 누님으로 8남매 중 장녀신데, 여러 면에서 귀감이 되시는 집안의 리더시다. 조카인 나에게도 기쁜 일에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시고, 어려운 상황에선 용기를 주신 감사한 어른이시다. 


‘한 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드디어 일을 벌였군요. 꽤 의미 있는 일이 되겠어요. 생각해보니, 두 아들들이 어려서부터 엄마의 트레이너였군요. 오늘을 준비하도록 하신 하느님의 배려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조카님 또래였을 때.  친구가 신장염 치료 중 고열로 시력을 잃었어요.  너무 가여워서 내가 지금 자네가 하고 있듯이 좋은 책을 읽어서 들려주고 싶었는데, 방법을 잘 몰라서 실천을 못 했어요.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남을 위해 나눈다는 것, 사랑의 실천이고 보람입니다. 축하하고 격려합니다.'


별것 아닌 일의 의미를 높게 평가해주시니 힘이 났다. 늘어난 독자를 위해 더욱 정성을 들여 실감 있게 낭독을 해보리라. 


파일을 녹음해 보내 드린 두 번째 날 오후, 고모님으로부터 도착한 리뷰는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자네가 팔 십중반 이 할머니를 그 옛날 대학교 1학년 영어 강의실에 데려가서 헤밍웨이를 듣게 해 주었네. 그때 그 노교수께서는 고기 잡는 할아버지와 어린 소년이 사랑과 협조로서 꾸준히 투쟁해 오면서 오늘과 같은 미국을 만들어온 미국의 협동정신을 강의하셨네.


자네의 꾸준한 노력은 자네를 키워주리라 믿네. 파이팅! 


개미 한 마리가 자기 몸만큼 큰 짐을 물고 열심히 옮겨 가고 있네요.’


고모님은 팔 십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놀랄 만한 상상력과 기억력 그리고 명철함과 감성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지친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좁은문을 통과해 들어가려고 낑낑대고 있는 조카를, 몸만큼 큰 짐을 물고 가는 개미에 비유하시며 응원과 격려를 해 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네 번째 파일을 보낸 날도 감상문이 올라왔다. 

‘수고했어요. 아버지도 상상 속에서 그 배 안에 노인과 함께 타고 있으면서 낚싯줄에 매달려 투쟁하고 있을 겁니다.’


내가 아침마다 책을 펴는 이유를 정확히 집어내고 계신다! 상상 속에서라도 그 좋아하는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노인이 고기를 잡아 올릴 때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힘을 얻고, 노인이 작살을 들어 상어의 정수리에 내리꽂을 때, 지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칠 수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노인이 고기와 투쟁을 벌이며 기도를 하는 장면이 등장했던 6번째 날이었다. 

‘주의 기도. 성모송을 백 번씩 암송하기로 약속하면서 우선 도와 달라고 신에게 매달릴 정도로 지쳐 있으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투지력. 끈기. 쟁취욕. 참 대단하군요.’ 


‘고모님, 참 이상한 일인데 책을 고를 때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걸로 생각해서 고르는데, 꼭 거기 하나님이 딱 앉아계시네요. 로빈슨크루소도 그랬고, 이번에도 어부인 노인이 계속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고모님께서 답해주셨다. 


‘하나님은 아시고 계시니까요. 믿어도 좋을 겁니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도 태양이 있음을 믿듯이,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은 어부 할아버지 배 가까이도 계시고 자네가 책 고를 때도 어디든지 계시니까요.


지금은 침묵 중이셔서 모르지만. 역사가 흐른 뒤에 그 섭리 중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깊은 영성과 사랑의 마음으로 들려주시는 고모님의 말씀은 마치 신이 아버지와 내게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로 들렸다. 


마지막 날 아홉 번째 파일을 보낸 후였다. 

‘언덕 위 오두막집에서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눈물 흘리는 소년을 생각하며 왜 이리 목이 멜까요. 끝까지 곁을 지키며 운이 없으면 자기 운을 가지고 가서 앞으로는 꼭 함께 지켜 돕겠다는 소년의 다짐을 들으며 깊은 인간애와 사랑에 위로를 느낍니다. 


어부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헤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통이라기보다는 연민과 애착을 느낍니다. 요 며칠. ‘


그 대상이 누구든, 거장의 좋은 작품은 우리를 깊은 영혼의 심연으로 데려가는 듯하다.  심연 속 영혼간의 대화는 깊이가 다른 감동을 준다. 아마도 책의 치유효과는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문학소녀셨던 고모님과 함께한 낭독과 대화를 통해 너무나도 값진 선물들을 많이 받았다. 감사한 일이다. 삼십 년쯤 지난 어느 날, 나도 조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무게를 두는 요즘의 잣대로 보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지는 노인과 바다의 결말을 보며, 작가 헤밍웨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지 궁금해진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는 노인의 대사를 통해 자연이라는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면서도, 그 안에서 맞닥드린 시련 앞에 강인하고 끈질기게 버텨낸 노인의 정신, 그것이 헤밍웨이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한 이야기였겠지. 


아마도 노인은 사랑하는 소년에게 항해 매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줬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노인의 손바닥 상처를 싸매며 들었던 그 이야기들은 소년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가, 언젠가 소년 자신이 시련 앞에 섰을 때, 인내하고 버텨나갈 힘과 지혜를 주었을 것이다. 


윗세대들이 인생이란 바다를 헤쳐가며 인내하며 살아남은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살아있는 정신들을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며, 또 내 삶의 바닷속 항해 이야기들을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헤밍웨이 선생은 내게 말하는 듯하다. 


엄마의 낭독 이야기를 들어왔던 아들이 어느 날 너스레를 떤다 “엄마, 친구가 래퍼 경연 대회에 출전한데. 나도 랩 가사를 써 봐야겠어. 우리 가족 모두 문학적 감성이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겠어?”


십 년 전 프랑스 사업가가 이야기하던 ‘아들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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