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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Aug 05. 2021

시간의 무게를 놓아주다

금강경 수업에서 얻은 것들

‘경을 읽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 것이다’ 


경을 공부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오랜 지인에게 들은 이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성경을 통해 얻은 빛을 세상 다른 ‘경’들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걸까? 불경이나 유교 경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기회가 되면 공부를 해 보리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더니, 최근 만나 뵈었던 한 갤러리 관장님께서 금강경 공부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금강경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불경이라면서, 한국 미술가들을 서구사회에 소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최근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13주 비대면 수업에 등록을 했다. 


강의는 불교 경전, 불교 미술뿐만 아니라 성경과 유교 경전에까지 이해가 깊으신 여명 스님이셨다. 


첫 강의는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인 정념에 대한 것이었다. 


‘금강경은 정념에서 시작하여 정념으로 끝난다. 정념이란 끊임없이 지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저 멀리 산속일 필요도 없고 고요할 필요도 없으며 출가할 필요도 없으며, 많은 경전을 알 필요도 없으며,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설거지를 남겨두지 않기”


일상에서 정념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스님의 명강의와 참여자들의 진솔한 나눔 덕에 토요일 오전 한 시간 수업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스님께서는 매번 강의 이후에 재미있는 숙제들을 내주셨다.  


첫 주는 밥 숟가락 한 숟가락에 담긴 쌀알의 숫자를 예측해보라 하셨다. 70개? 200개? 학생들마다 대략의 숫자를 말했다. 실제로 밥숟가락 한 숟가락에 담긴 쌀알의 수를 세어보고 감상을 나누는 것이 숙제였다. 


밥상 위에 종이를 깔고, 쌀을 담은 그릇에 밥 숟가락을 깊게 넣어 쌀알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쌀알을 종이 위에 펼쳐 놓았다. 쌀알을 열 개씩 묶어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열, 스물…, 백...., 이백… 무려 칠백 열세 개였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밥상 위에 놓여졌던 밥그릇, 그 안에 수천의 쌀알이 담겨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참 많이도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숙제는 수저를 들 때부터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밥 먹는 동안 나의 마음과 행동을 챙기는 것이었다. 저질 소화력을 가진 내가, 급히 먹는 남자들 사이에서 밥을 먹다 보면 체하기가 일쑤라, 늘 그들의 식탐과 급함을 원망해왔다. 


그러나 테이프를 조금만 앞으로 돌려, 저녁식사 전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니, 나는 그 누구의 식탐에 대해서도 비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야채며, 빵까지 입에 가득 넣고 먹다가 정작 밥상에 앉을 때가 되면 배가 거의 채워진 셈이니, 밥상에서 밥을 조금만 먹어도 과식하기 마련이었다. 누굴 탓하랴!


정념 연습을 하며 나의 삶의 순간들을 들여다보니 생활 속 나의 모습은 내 머릿속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급하고, 식탐이 많으며, 교만하고, 허영심이 많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영혼의 가면을 쓰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르고 남을 정죄하며 목을 곧추세워 살고 있었다니…. 


수업을 들은 후로 밥을 정성껏 씹어 먹으며, 쌀알들이 내 입안에 들어오게 된 인연을 감사하려고 한다. 식사 준비하면서도 이것저것을 입에 넣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신경을 쓴다. 정신줄을 놓으면 오래된 습관의 힘 앞에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본다. 


매일의 삶에서 정념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그 과정이 어떤 문장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유익했다. 스님께서 숙제를 내주신 뜻을 알 것 같았다. 


금강경 공부를 하며, 또 한 번 나를 들여다보게 된 순간은 총 32품의 금강경 구절 중 제6품을 배울 때였다. 


‘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뗏목의 비유! 위험한 언덕에서 뗏목을 타고 안전한 언덕에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 뗏목을 버리기 아쉬워 뗏목을 머리에 이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이, 설법을 깨달은 것을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쓴다면 그것은 마치 강을 건넌 뗏목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깨달음 조차 남겨두어봐야 마음의 찌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니 비우고 또 비우라는 뜻이다.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 사회적으로 성공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경험 속 다양한 뗏목을 이고 산을 오르느라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 많은 경우, 오래된 그 뗏목이 나를 식상하고 지루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지. 변화가 빠르고 정보가 투명한 시대이기에,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는 낮아진 마음과 성실한 태도만이 불변의 도구인 것을. 


어리석게도 그 뗏목을 나의 어깨만이 아닌 자식들 어깨에 까지도 하나씩 메어주려고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 내 아이는 내가 아니고, 그들이 살아갈 세상 또한 내가 살았던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데 말이다. 뗏목을 만들던, 수영을 하던, 스스로 강을 건너는 법을 터득하도록 격려하고 지켜봐 주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것이리라!


글쓰기라는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나를 전진하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있는 완벽주의라는 뗏목을 내려놓자. '여여히' 물 흘러가듯 재미를 느끼며 즐기며 나아가 보자.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공부할 때는 기억력이 좋은 게 장점이지만, 인생을 살면서는 기억력 좋은 게 도움이 못 된다. 과거에 받은 상처도, 미안했던 마음이나 죄책감도 오래간다. 과거의 무게만으로도 무거운데,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 미래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세우고, 늘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고민하는 습관까지 들었으니 평생 내 마음은 무지하게 긴 시간의 무게를 모두 한꺼번에 이고 지고 살아온 것이다. 


고치려고 해도 생긴 게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금강경 수업 마지막 시간 배운 문장이 마치 나의 마음속을 누르고 있는 미련한 시간의 무게를 잘라내는 날카로운 칼처럼 다가왔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지난 과거 일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일도 생각하지 말라. 

과거는 지나 버렸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의 일을 잘 관찰하여 

그것을 확인하고 실천할 것이다. 

나의 행복도,

나의 불행도,

모두 나 스스로 짓는 것

결코 남의 탓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마음의 번뇌는 모두 ‘잘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잘 해내겠다는 내 욕심이 나를 너무나 긴 시간의 올가미에 옭아매고 있었으리라!


걱정하는 마음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만 시간의 무게를 내려놓자! 도를 닦는 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


금강경이라는 진리의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의 마음과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 자체가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더 감사하고, 건강하며,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자세를 갖게 되는 듯하다. 


그 마음이 매일의 삶에서 나를 이끌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삶 속 다이아몬드를 누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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