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아름다운
"이제부턴 숙제도 내려고 해요."
봄을 맞이하는 선생님의 선언에 내심 기뻤다. 안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는데 숙제라는 의무감으로라도 해야지.
추천해 주신 일본 수채화작가의 작품들을 골라 어떤 소재라도 어떤 크기라도 그려보라고 하셨다.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탐색하다 한쌍의 원앙 그림을 발견했다. 새를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크니 다른 작가가 그리는 새 그림을 따라 해보자 싶었다.
하지만 어설픈 아티스트 정신이 발현되며, 순순히 작가의 아련한 수채화를 맥없이 그대로 따라 하긴 싫었다.
그동안 세밀 붓을 들고 한 작품에 긴 시간 몰두하다 보니 힘도 들고 또 언제쯤 턱턱 몇 번 만의 붓터치로 대작을 그리는 작가가 될 수 있나 하는 섣부른 조바심이 생겼었는데 한번 해보자 싶었다.
아크릴 물감을 나이프로만 턱턱!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았다!
큰 종이를 화판에 고정하고 대강의 스케치를 한 뒤 물감을 쭉쭉 짜서 나이프로 턱턱! 즐거웠다. 큰 공을 들이지 않아도 만들어지는 형태와 마치 대가의 것인 양 힘 있게 뻗어나가는 굵은 선들로 화판의 지배권을 가진 황제인양 기세가 등등해졌다.
아무리 세밀하게 정교하게 선을 그려보려 해도 나이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밀한 묘사에 대한 욕심의 싹을 자르고 나니 그저 힘 있게 에너지를 담을 수 있었다.
새의 깃털 하나하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새의 몸을 이루는 빛과 어둠만 따라 굵은 터치를 하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했다.
제법 새의 형태를 띠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새 두 마리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또 한 번 의외의 감정을 맞닥뜨렸다. 할 때는 신나더니 다 그리고 나니 공들여 힘들여 작업했을 때에 비해 마음이 허했다.
역시나 나는 세밀 표현이 적성에 맞는 건가? 고생이 팔자인 건가?
배경 작업을 할 차례였다. 아크릴물감 색채도 강한데 터치도 강하고 그 상황의 밸런스를 맞춰주면서도 배경자체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또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문제해결연습을 통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또한 골똘히 생각해야 할 나만의 문제가 있으니 주변이 시끄러워도 신경이 덜 쓰인다.
그래서 그림이 좋다!
강한 피사체를 수채배경의 부드러움으로 안아주어야겠다. 그 대신 색채는 원색의 느낌을 유지하기로 해 물감을 많이 섞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드라이 파스텔로 마치 볼터치를 하듯 색을 올려 문지르기 시작했다.
매 작품마다 절망의 순간도 희열의 순간도 늘 경험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피사체에 몰두할 때만큼 배경작업을 통해서도 큰 희열을 느낀다.
부드러운 배경과 조화를 맞춰주기 위해 원앙의 몸체에 다시 오일파스텔로 부드러운 빛을 준다. 그렇게 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격정과 실망, 고민과 버텨냄 끝에 느끼는 잔잔한 환희! 이 과정을 부담 없이 즐겨가며 감정마다 회복하는 힘을 길러주기에 그림 그리기만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한 쌍의 원앙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한 그림을 보니 남편과 내가 떠올랐다. 어느덧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졌다.
사랑의 격정과 실망, 고민과 견딤, 환희가 결혼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그림은 인생과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