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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된 그림

눈, 꽃, 바람

by 블루비얀코

아뜰리에서 작업하면서 새로운 작업주제를 정할 때면,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선생님이 권유하시는 아이템을 용기를 내어 시도를 해보느냐 아니면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만만해 보이는 그림으로 향하느냐의 기로이다.


선생님은 꽃을 사랑하시고 또 꽃을 잘 아시기에 많은 경우 꽃 그림을 권하신다. 그런데 나는 꽃은.... 제일 흔한 게 꽃그림인데 나까지 그려야 하나....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뜻이 있으시겠지, 선생님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겠지 생각하며 중간중간 꽃을 그린다.


이번에도 캘린더에 있는 꽃의 이미지를 권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권하신 사진은 정직한 꽃사진이 아니었다. 얼굴만 내밀고 해맑게 웃고 있는 꽃들이 아니라, 봉우리가 엎어진 꽃,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꽃 등....


저마다의 이야기가 재미 있었다.


편견의 벽을 넘어보자, 배우는 게 있겠지...


이왕 꽃을 그릴 거면 이참에 꽃에 대해 더 자세히 알자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꽃을 제대로 찾고 알아야 제대로 그리지 싶었다. 핸드폰 갤러리 이미지를 돌아보며 스케치하고 싶은, 그러나 그리기 어렵지 않을 듯 보이는 달리아의 이미지를 찾았다. 주말 동안 달리아와 실랑이를 하며 색연필 스케치를 연습했다.


흠. 나도 이제 꽃을 조금은 알게 되었군.


아뜰리에로 돌아와 보니, 지난주 그려놨던 꽃의 이미지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이제 꽃을 좀 알았으니 자신 있게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수채화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아크릴 물감을 팔레트에 섞어놓고 힘 있게 그려나갔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던가!


구도도 색감도 엉망, 단 한송이 눈에 들어오는 꽃이 없다. 늘 맞이하는 망했다 싶은 순간이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망작의 터널'에 갇힌 듯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내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도 제자의 망작을 한참 쳐다보고 계셨다. 이건 좀 대공사다 싶으신 거지.


그러나 이내 선생님의 격정적인 붓놀림이 시작됐다. 제자의 손을 잡고 어둠의 터널을 탈출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작품 안에 에너지를 쏟고 계셨다. 그림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처음 보게 된 선생님만의 뜨거운 몰입의 순간이었다! 전율이 느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 답이 없어 보이던 그림이 완전히 다른 빛을 띤 멋진 작품으로 환골탈태! 붓터치, 구도, 흰색 아크릴 물감의 가능성 등 너무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웬걸? 터널에서 나왔음 기뻐야 하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건 웬 말도 안 되는 못난 자존심이란 말인가? 작품은 좋아졌는데 이건 내 건 아니지, 싸인은 못하겠다 하는 마음이 쑥 올라온다.


사인을 할까 말까....


아틀리에에 혼자 앉아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되짚어 본다.


배움 그 자체, 그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의 하나라면, 이 작품은 내겐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의미를 가진다. 내 능력에 벗어난 수준에 대한 도전,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얻게 된 배움의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70세가 넘으신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 그걸 보게 해 준 작품이었다.


싸인의 의미가 이 작품의 과정을 통해 '나는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여전히 부족하고 배울 게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라면 싸인을 못할 것도 없을 듯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테두리의 테이프를 뜯어 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터키색 석 블루로 리드미컬하게 사인을 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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