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이야기
지난번 꽃그림을 통해 스승님의 사랑과 겸양의 미덕을 배우고 나니, 꽃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늘어나게 된 듯하다. 내가 좋아하는 수국꽃이라면 그려볼 만하지 않을까. 좋아하니 그만큼 정성을 쏟겠지....
여러 가지 색채가 돋보이는, 그러면서도 수국 안의 꽃잎들이 각기 다른 모양과 구도로 자리를 잡은 수국의 이미지를 찾았다.
화실에 가져다 놓은 가장 큰 종이를 꺼내 수국 한송이를 커다랗게 스케치했다. 꽃잎 하나하나의 모양과 색채, 빛과 그림자를 살려 수채화 물감으로 칠을 해갔다. 칠하다 보니 꽃잎들의 모양과 색이 저마다 다르게 아우성을 치며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수국조차도 그려내지 못하는 거야?
그림이 길을 잃은 듯하다는 선생님 말씀에 갑자기 절망감이 몰려왔다. 실제가 그랬다. 수국꽃의 '따로 또 같이'는커녕, 색채도 단순하지 않고, 명암도... 거기에 그림을 통해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하나도 정리가 안됬으니...
실력도 안되면서 왜 자꾸 어려운 걸 고르는 거냐고!
더는 선생님께 구출을 부탁하기도 싫었다. 매번 그러려고 한 시간씩 차를 타고 그림 그리러 나오는 게 아니잖아.
"저는 꽃은 안되나 봐요!" 큰소리로 외치며 화실문을 박차고 나왔다. 심호흡을 통해 화를 가라앉히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꽃에서 무엇을 보나?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내 눈에는 꽃의 색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꽃의 구조가 매력적이다. 아련한 분위기보다는 똑 떨어지는 구조와 컬러를 표현해내고 싶다. 또한 꽃잎들은 같은 것 같아도 각기 다르다. 따로 또 같이 가 주는 에너지가, 바로 그게 재미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리냐고!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려 상가를 돌고 있는데 작은 양품점에 놓여있는 꽃무늬 손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최고로 단순화되어 있는 꽃의 모양과 몇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는 패턴이 꽃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작업의 경우의 수를 단순하게 만들어야 해!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자. 그 한 가지에 자신이 붙었을 때 다른 걸로 옮겨가자. 플라워 컬러링북에 색연필로 색칠을 연습했다. 수채화 색채표현의 기초영상을 찾아 물방울부터 색을 칠해보았다.
잠들 때도 깰 때도, 마음속에서 '다시 기본으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주일 뒤, 화판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갈 곳 몰라하는 수국 꽃잎을 대면하며 숨 고르기를 했다. 딱 5가지 색의 오일파스텔만을 손에 쥐고 다른 모든 도구를 집어넣었다.
내 영혼이 품고 있는 수국을 화판에 옮기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어 시간쯤 지나자 제법 멀쩡해진 수국의 얼굴이 무게감 있게 화판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꽃잎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역사를 지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빛과 어둠을 한 꽃잎에 품고 있기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품위를 갖는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그림으로 기운을 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그림 속 꽃잎이 이야기를 건너면 그것으로 꽤 괜찮은 거 아닌가?
"사순절이라 보라색꽃을 그리신 거예요?" "아뇨. 그런 생각 없이 그저 좋아서 그렸을 뿐인데 고난의 시간을 호되게 겪었네요. 힘들었으니 그만큼은 더 영글겠죠."
혼자의 힘으로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뿌듯함이 노란 봄빛으로 나의 내면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