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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Sep 29. 2024

기억의 향기

의식 속에 잠겨있는 우리의 기억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올라 일순간 우리의 시공간을 허문다.

 

기억. 우리의 기억은 뇌에 그저 새겨져 있는 기록에 가까운 단순한 기억부터, 마음을 움푹 파이게 만든 중대한 기억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 온도, 색, 질감을 지니고 있다. 어떤 기억은 그것이 지닌 의미로 인해 추억으로 신분이 바뀌기도 하고, 어떤 기억들은 그 무참함으로 인해 강제적 소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삶에 한시적이든 지속적이든 막대한 영향을 준 기억이라면 그 기억의 긍정성 혹은 부정성을 떠나 삶의 기간 동안 두고두고 소환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기억. 기억은 기억이 만들어진 상황과 이후 효과에 의해 열렬히 사랑을 받거나 철저한 거부의 대상이 된다. 전자의 경우 기억은 기억이 담긴 다양한 물건 등을 통한 적극적인 소생의 노력에 의해 수시로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로 소환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기억이 담긴 다양한 물건 등을 폐기함으로써 어떻게든 현재로의 출입을 불허당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본래의 기억에 의미가 거듭 부여되어 새로운 기억으로 진화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본래의 기억에 담긴 의미를 거듭 축소하려는 노력 끝에 마침내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어 사라진다.


오늘 작업실에서 손을 닦고 핸드크림을 발랐다. 향이 좋아 언젠가부터 즐겨 사용하던 핸드크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핸드크림의 향이 예사롭지 않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을 단박에 파고들어 틈을 벌리고 말았다. 내가 무엇을 할 새도 없이 그 틈사이로 용을 쓰며 묻어두었던 아픔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왜 아픔인 거지? 내가 이 핸드크림을 대체 언제 처음 사용했던 건데? 


나의 기억은 어렵지 않게 3년 전 초겨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핸드크림은 당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막 시작하고 있던 나에게 오래된 제자가 찾아와 건네준 선물이었다. 당시 이 핸드크림은 특별히 내 마음을 끌어당겼었다. 향의 이름이 매우 시적인 White Rain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차가운 겨울느낌을 담고 있는 향이 마치 내 마음의 향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겨울의 문턱에서 핸드크림의 향을 통해 내 마음속 슬픔의 실재를 확인했었다.  


의식 속에 잠겨있는 우리의 기억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올라 일순간 우리의 시공간을 허문다.


이미 거의 사장된 기억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억이 품고 있는 감정의 파장은 여전히 잔존하여 예상치 못한 오늘 같은 날 나를 순식간에 과거로 이동시켰다. 묻어둔 기억이라 없었던 일인 듯 살고 있었는데 향기로 인해 그 존재여부가 밝혀진 것이다. 


있었던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부정하려는 노력은 그 일이 있었음을 되려 확인해 준다. 고통스러운 수용과 인정만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게 하고 더 나아가 언제까지나 현재의 부분으로 남아있을 과거를 다독거려 앉힐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런 이유로 이 핸드크림을 지금도 곁에 두고 사용한다. 이 향기 속에서 나의 과거는 현재와 공존한다. 그리고 우위는 이미 현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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